3. 남명학이 한국유학사에 끼친 영향

퇴계는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성정(性情)을 정성스럽게 바로 하는 수기(修己)적 학문으로만 간주되던 성리학의 철학적 탐구를 통해 그 속에서 치인(治人)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로써 성리학의 리학적 질서를 현실에 적용하고 연계하여 수기치인'의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남명은 경세치인(經世治人)의 학문으로 인정되던 전통유학의 경전연구를 토대로 스스로의 사유체계를 확립하여 수기의 방안을 개척하였다.
이로써 유학에 철학성을 가미하여 명실상부한 수기치인'의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해 중국적 유학과 성리학이 갖고 있는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여 고금을 관통하는 학문체계 수립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동시에 철학적 형이상학과 실제적이고 경세치용적인 학문이 겸비된 진정한 한국적 유학체계가 확립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남명의 위기(爲己), 실천적인 학풍은 후세에 양식있는 많은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학자로, 먼저 조선 효종·현종 때의 탄옹(炭翁)권시(權諰)는 남명의 영향을 받아 실천유학에 힘쓰면서, "일찍이 조남명이 '근세 학자들은 고상하게 성리학을 말하지만, 그 행동을 생각해 보건대 곧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한 말을 보았다. 그 언사를 보건대 억양(抑場)이 너무 지나친 듯함이 있으나, 스스로 내 몸을 돌아보니 그 병통에 꼭 들어 맞았다." 라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영남 퇴계학파의 후예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는, 당시 영남이나 기호할 것 없이 유학자 치고 리기론에 골몰하지 않은 이가 없고, 그마저도 정주(程朱)가 한 말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자세히 보면 모두가 '공언(聖言)'이요 아무 쓸모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조남명이 이퇴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르기를, '근래의 학자들은 손으로는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한다'고 하였다. 그 당시도 오히려 그리 거늘 하물며 오늘이야? 경계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라고 한 바 있다.
조선 말기 호남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역시 같은 말을 하면서 '이것이 바로 후세 학문이 수사(洙泗: 공자와 맹자의 학문)와 달라진 까닭이다' 라고 하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범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한다'는 남명의 이 한 경구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뜻있는 후학들에게 얼마만큼 큰 영향을 끼쳤을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할것이다.
남명은 우리 나라 학문하는 지식인의 전형인 선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천 길 벼랑을 깎아 세운 듯(壁立千)', '일월과 빛을 다투는 듯한(日月爭光)' 기상과, 추상열일 (秋霜烈日) 같은 위엄, 드높은 학행(學行)은 그 당시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 산림(山林) 출신을 숭용(崇用)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선비의 풍모와 호걸의 체질을 아울러 갖춘 남명은 안자(顔子)의 호학(好學) 정신과 성인의 기상을 본받아 평생토록 고고한 인품에다 강의(剛毅)한 기절(氣節)로 일관하였다. 생강과 육계(肉桂)가 오래 묵을 수록 매워지는 것처럼 노경(老境)에 들어서도 성품과 기개가 시들지 않고 더욱 꿋꿋하고 씩씩해진다고 술회한 바도 있다.
이윤은 자기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聖君)이 되게 하고, 그 백성을 요순시대의 어진 백성이 되게 하는 것으로써 자임(自任)한 인물이다. 이런 이윤이 뜻한 바에 뜻을 두었다면, 남명의 기본적인 입장은 산림에 은거하는 출세간적(出世間的)인 것으로부터 세상에 나아가는 입세간적(入世間的)인 것으로 전환되었음에 분명하다. 다만 그의 기풍과 사상을 보면, 대체로 세속을 벗어난 현실을 초탈한 것과 강한 입세간적 세상을 맑게 하고자 하는 숙세주의(淑世上義)가 그 의식세계의 두 축을 이루면서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이 특징적이다.
《장자(莊子)》에시는 '현사는 뜻을 높이 갖는다(賢士尙志)'고 하였거니와, 남명은 '선비'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비야말로 제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입장이라고 늘 강조하였다. 비록 은군자(隱君子)에 머물고 말았지만, 누항기(記)〉라는 글을 보면,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선비상이 어떠한 것이며, 또 그 선비상에 나타난 스케일이 얼마나 웅대한시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찍이 이이는 참된 선비는 '도학하는 선비'라고 하면서, "이른바 진유(眞儒)란 나아가서는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行道) 백성으로 하여금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고, 물러가서는 만세에 가르침을 내려주어(正敎) 배우는 이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한 바 있다. 행도와 수교의 양면에서 결함이 없어야 참된 선비라는 것이다. 그러나 '행도'는 수교와 달리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겸전하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남명은 한 세상을 경륜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을 만나지 못해 끝내 은사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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