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수필가 박덕은
시인 수필가 박덕은

소리에도 무게가 있다. 달밤을 가득 채우는 대금산조. 상처 먹고 자란 대금 소리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사납게 일렁이는 속울음처럼 애절한 음이 찻집을 가득 메우더니, 이내 가을 산에 취해 모여든 사람들의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킨다. 마음 한 켠에 깊숙이 묻어둔 사연들이 소리의 옷을 입고 저릿하게 다가온다.

  대금을 제작할 때 최고의 재료로 쓰이는 것은 쌍골죽이다. 병든 대나무라 하여 병죽(病竹)이라고도 불리는 쌍골죽은 마디 양쪽에 골이 패여 있다. 일반 대나무와는 달리 쌍골죽은 어느 정도 크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속이 두텁게 차오른다. 그런 상태로 힘들게 수령을 이어간다. 나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그녀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몸이 허약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대학 입학 후 신입생 첫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과 결혼했다. 그녀는 사랑에 대해서만큼은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폭설 속에서도 푸른 생을 내뿜는 대나무처럼 사랑을 지켜나갈 거라며 행복해 했다. 마음이 따스하고 밝은 성격의 그녀 주위엔 늘 친구가 많았다. 친구들과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그녀는 출렁이는 햇살에 반짝이는 댓잎처럼 늘 활기차 보였다. 시어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살갑게 다가가는 그녀는 형편이 넉넉지 않아 이사를 자주 해야 했다. 남해안 어느 항구 근처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직장을 자주 옮긴 탓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련을 통해 대나무의 마디가 만들어지듯, 그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잘 이겨냈다. 허리뼈 빠개지도록 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대나무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식물이라 한다.
그녀는 그런 대나무처럼 강인함으로 역경을 잘 헤쳐 나갔다. 아들 하나 딸 둘을 키우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은 갑자기 입원을 했다. 남편의 긴 투병 생활을 예고한 듯 그녀의 일상 속으로 아픔이 시나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만큼 자라면 성장하지 않는 쌍골죽처럼 그녀의 행복도 멈춘 것인지, 얼마 안 있어 그녀도 뇌출혈로
쓰러졌다. 막내가 중학교를 채 졸업하지도 않았는데,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 후에도 여러 날 깨어나지 못했다. 깨어난 후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지끈거리며 눈알이 빠질 것 같다며 몹시 힘들어 했다. 그녀의 눈빛에 빽빽하게 들어찬 슬픔이 속울음에 엉겨 붙어 병실은 어둡기만 했다. 퇴원한 뒤 어느 날이었다. 여든이 넘은 시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갈비뼈와 허리뼈가 부러졌다. 아픈 몸으로 시어머니를 병간호하며 그녀는 힘겹게 삶을 이어나갔다.

  그녀가 서 있는 길은 아찔한 벼랑 끝이어서 동서남북 그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차오르는 서러움을 대나무의 마디 같은 가슴뼈 안쪽에 쌓아두어야 했다.
생육환경이 좋지 않아서인지 깊은 산의 경사진 곳이나 돌이 많은 곳에서 자란 쌍골죽은 S자 모양으로 휘어지고 뒤틀린 경우가 많다. 이런 쌍골죽으로 대금을 만들려면 최소 일 년 동안 정성을 들여야 한다. 쌍골죽의 습기를 제거한 뒤 휘어져 있는 부분을 불로 달구고 힘을 줘서 곧게 펴는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관성처럼 다시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데군데 명주실로 동여맨다. 그런 상태로 바람이 잘 드는 그늘에다 한동안 놔두어야 한다.

  수술을 한 지 5년이 채 안 된 가을, 그녀는 다시 뇌수술을 하기 위해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영영 나오지 못할까 봐 무서워했다. 수술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 가 지상의 명단에서 이름 석 자가 영원히 사라질까 봐, 그녀는 울음을 쏟아냈다. 잘될 거라며 서로를 껴안는 아픔에 그날 오후는 숨죽이고 있었다. 수술 시간은 길어지고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에 숨통이 막혀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힘들어했다. 다행히 수술은 잘됐지만 혈관을 막는 피떡때문에 삼 일 넘게 혈전용해제를 써야 했다. 그녀는 산소 호흡기로 버티며 이겨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퇴원한 그녀가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사는 여자예요.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남편이 예쁜 자식을 셋이나 낳아 줘서 고맙다며 손가락 세 개를 번쩍 세우더니 힘내라고 응원해 줬어요.
어제는 유자차도 한 잔 마셨어요. 참 따스한 시간이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감사해야 할 것들이 참 많더군요. 그걸 그동안 잊고 살았더라구요." 쌍골죽처럼 휘어지고 뒤틀린 삶의 뒤안길을 묵묵히 견디며 걸어온 그녀는 이제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산다고 웃으며 말했다.

  삶은 우리가 꿈꾸는 방향으로 가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 꿈과는 너무 멀어져서 도저히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 내 인생의 이야기를 명주실의 흰빛으로 동여매듯 새롭게 써야 한다. 쌍골죽은 일반적인 대나무보다 속이 꽉 차 있는데 속살의 두께가 1.3~2.4배가량 더 두껍다. 그 두께만큼 상처도 깊어 쌍골죽으로 만든 대금은 희로애락의 감성을 잘 짚어낸다. 대나무의 안쪽 벽에 바람의 흐느낌과 달빛의 울컥임까지 새겼기에, 감성의 깊이가 남다르다. 병들며 커 가는 아픔을 안고 자란 탓인지 애처롭고 처량한 느낌을 쌍골죽은 잘 표현한다. 상처 깊은 아픔이 한에 짓눌리지 않고 그 한을 넘어선 소리에 다다를 때까지, 대금을 만드는 사람도 쌍골죽 스스로도 기도의 시간을 가지며 이겨냈을 것이다.

  지천명을 넘기고 이순을 바라보는 그녀는 삶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며, 엄마이니까 자식을 지켜야 한다며, 그녀는 죽을 만큼 아프다는 통증을 견뎌내며 하루하루 기도를 했다. 그러자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슬픔만 바라보던 그녀는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여자로 서서히 변모되어 가고 있다. 절망과 좌절에 맞닿아 있던 그녀에게서 따스한 위로를 받는다.

  슬픔을 따스한 위로로 무게감 있게 연주한 대금 소리가 가을밤 찻집을 물들이고 있다.
달빛에 젖은 계면조(界面調)의 흐느끼는 가락이 은은하고 편안한 평조(平調)로 바뀌고 있다.
소리에 젖은 밤이 깊어 갈수록, 내 마음도 어느새 고요해져 간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