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동양철학계는 중국철학의 제자백가와 송명 리학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한국유학사 연구에서는 일제시대 일본학자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亭가 '주리(主理)'와 '주기(上氣)'문제에 근거하여 영남지방의 퇴계학파와 기호학파로 율곡학파를 중심으로 성리학을 정리한 후 연구자들은 최근까지도 여기에만 매달리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계의 연구풍토에서 남명학파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한국 유학사상사적인 의의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한국유학사에 있어 남명은 퇴계, 율곡, 다산(茶山)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인물의 하나이다. 김충렬은 "이론면의 퇴계학, 정교면 (政敎面)의 율곡학,경세면(經世面)의 다산학에다가 정신면의 남명학이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조선조 유학은 네 기둥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는 셈이다." 라고 지적하였듯이, 한국유학사상사에서 남명이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우뚝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남명학에 대한 연구가 자못 활발해짐으로써, 그의 학술적 공헌이라는지 유학사적 위치, 후세에 끼친 영향 등이 보다 깊이 있게 탐구되고 있는데, 남명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실천유학의 초석(礎石)을 다진 학자이자 선비상을 확립시킨 산림처사였으며, 또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이자 사상적 연원을 이룬 학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한국유학사상사에서 남명이 차지하는 위치를 실천유학의 초석을 정하였고, 선비정신으로 출처사상을 확립하여 세상을 맑게 하였으며 실학사상의 연원으로 경세사상을 이룩하였다.
남명의 시대는 이미 주자학이 한국에 유입된 지 이백 년이 되어서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에 의해 나라를 경영하고 학문의 초석을 쌓는, 즉 '의리(義理)'를 처음 발전케 하는 계기를 마린하였다. 그리고 이를 거쳐 김종직,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스승제자 사이로 삼대에 걸쳐 서로 계승한 '경세치용'이 있었다. 이어서 서경덕, 이언적, 이황, 이이 등의 '성리학' 등을 거쳤기 때문에 주자학은 당시 한국에서 개화의 결실을 맺고 있었으며 주자학은 조선을 다스리고 사람들을 교육하는 최고이념이었다.
그러나 남명은 주자 성리학의 기존 틀을 결코 묵수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주자학은 거경궁리를 주요한 강령으로 삼는데 비해 남명학은 경의를 주강으로 삼는다. 정인홍이 지은 행장)에서 남명이 '경의'라는 글자를 특별히 창틀에 크게 써 놓고 일찍이 "내 집에 이 두 글자가 있음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음과 같아 만고에 영원하며 바뀌지 않는다. 성현의 수많은 말씀도 그 궁극적 결론은 모두 이 두 글자의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김우옹이 지은 〈행장)에서도 남명의 산천재의 창틀에는 "좌측에는 경(敬)자를 쓰고 우측에는 의(義)자를 써 놓았다. 그 경자의 곁에는 옛 사람들이 경을 말한 요점을 잔글씨로 써놓고 항상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생각했다. 몸이 아플 때에도 오히려 말을 염송하여 입에서 떼지를 않았다. 앓아 눕기를 여러 달 하여도 정신은 맑아 혼란스럽지 않았다. 그는 학자들과 말할 때는 오직 스스로 행동하여 큰 방법과 출처(出處)의 정신에 의거하였으며 정성스럽게 하여 피곤해 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남명은 유학의 거봉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유학 풍토에 정신유학의 학풍을 일으킨 고고한 선비로 평가 받는다. 남명은 분명 정신유학의 선구자로서 투철한 정신과 기백으로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움직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남명은 그 제자교육에 탁월하여 그의 문하에서 덕계 오건, 수우당 최영경, 내암 정인홍,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망우당 곽재우, 약포 정탁 등 수많은 학자, 정치인, 의병장들이 배출되었고, 후일 사숙인들까지 합하여 큰 학단學團)을 이루었다. 이들을 남명학파 또는 강우학파(江古學派)라고 일컫는다. 남명의 문인제자와 그 사숙인들은 지역적 특성과 아울러 스승의 기상과 학풍에 영향을 받아 대부분 강의개결 (殺介潔)한 성품과 산림에 은거하여 높은 뜻을 구하는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남명학파의 특성은 절의를 중시했다는 데 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星湖經說)》에서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한다(樂善子義)' 또는 의를 즐기고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樂義輕生)'고 하여 그 특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국가적인 위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거나 목숨을 바치는 것은 유자의 상사(常事)라 치더라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문인들 50여 명이 의병장이 되어 전국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큰 전과를 올림으로써, 의병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던 점이라든지, 병자호란 때 정인홍의 문인 동계(洞溪) 정온(鄭蘊)이 배청척화(排淸斥和)를 부르짖어 국론을 선도하였던 것 등은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남명의 경의정신(敬義精神)이 끼친 영향이 지대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남명이 추구하였던 실천유학의 사상적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곧 '경의(敬義)' 두 글자로 집약할 수 있다. 그는 평생토록 경·의 두 글자로 학문의 근본을 삼았는데, 경의 정신은 문학 작품에까지도 일관되어 있다. '경'을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은 것은 그의 신명사도명(神明圖銘)〉에서도 살필 수 있다. 한편 남명은 만년에 송(宋)나라 때 유학자로서 정주학 계열의 인물인 이연평(李延平)의 고사(故事)를 따라 성성자(惺子)라는 쇠방울을 늘 옷섶에 차고 다니면서 제자들에게 마음을 밝게 깨우치도록 '경의 의미를 각인시켜 주곤 했다고 한다.
경과 의는 체용(體用)의 관계에 있다. 즉, 경은 한 몸의 주체가 되며 의는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는 '경의 두 글자는 하늘에 해와 달이 있어 만고에 변하지 않음과 같으니, 성현의 천언만어가 모두 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남명의 학문적 면모는 '약례'의 측면에서 돋보인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공통된 인식인 듯하다. 박문약례는 성학(聖學)에서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것이다. 옛 성현들은 매양 이 점을 강조하여 가르쳐 왔는데, 사실 양면의 조화를 이루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남명의 학문은 양면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후학들에게는 양면으로 각각 특색있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약례는 박문보다 성취하기가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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