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우(시인. 수필)
송창우(시인. 수필)

가을 색으로 물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제2회 남명
문화제가 김해 장유 대청 중앙공원에서 열렸다.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날씨였지만 다양한
프로그램과 많은 시민의 참여 속에 성대하게 행사가 진행되었다. 시민들에게 조식 선생의
사상을 알리고 정신을 저 변화 하려는 노력에 깊은 감동을 하였다. 특히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선비정신과 실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성리학적 사상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말이 앞서고 믿음과 신뢰가 무너지는 사회, 생활 전반에 사라지는 도덕성 앞에선 더욱 그러하다. 21세기 최첨단 시대에 구시대적 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반문도 하리라 본다. 그러나 혼탁한 오늘날 윤리적이며 창조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고 문화적 의식 고취를 통하여 새로운 국가적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본다.

  그 역할을 남명 선생의 실천적인 사상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에 많은 문우들과 산해정 길에 올랐다. 남명 선생은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성리학은 고려 말 충렬왕忠烈王 때 원나라로부터 안향安珦에 의해 전래되었다. 고려 말의 정몽주, 이색에 이어 길 재, 조광조로 이어진 학문은 이황, 이이, 조식 선생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조식 선생은 스무 살 때 생원시, 진사시 양 과에 1,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사약을 받자 시국을 한탄하며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기묘사화는 조광조가 성리학에 의거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함에 있었다. 신진 사림들을 등용하여 정치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기묘사화를 계기로 조식 선생은 관직을 멀리하고 낙향하여 서른 살 때 처가인 김해로 이사하여 신산서원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을 쏟으셨다. 훈구세력과
사림의 정치적인 혼란, 사회 경제적인 어려움을 초래한 현 조정의 실정을 개혁하려는 마음을 접고 조정 밖 초야에서 잘못들을 자신의 학문 수양으로 개혁하려는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산해정(신산서원)은 조차산을 병풍 삼아 좌우측으로 까치산과 돗대산을 끼고 앞으로는 낙동강을 안고 있는 산수가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18년간 머무르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으셨다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999년에 산해정의 옛터에 복원 하였다는 안내인의 말과 올해에 진입도로 공사가 완료되어 지금의 모습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진덕문 입구에 시비가 있고 서원 뒤편에는 숭도사가 있어 이곳에서는 남명과 송계선생을 배향해 매년 음력 3
월 16일에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신산서원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우들과 서원의 이곳저곳을 보며 남명 선생의 실천 사상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조식 선생이 평생 추구하며 실천했던 학문적 정신은 경敬과의義였다. 경은 원래 유학에서 강조되는 개념이라고 한다. 유학 교육을 통하여 도덕적 수양을 바탕으로 생활 전반에 그 밑바탕을 두려 하였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참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다. 의는 올바른 것을 따르고 옳지 않음을 부끄러워하고 멀리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행동적인 면을 적절히 생활에서 조절하고 어긋남을 규제하는 것이다. 경과 의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고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의미를 더하게 된다고 한다. 경의사상은 도덕적 정진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인간다움을 실현하여 건전한 윤리의식을 고취함에 있다.

이런 경의사상을 바탕으로 실천을 통한 학문적 완성을 꾀하려는 했던 분이다. 오늘날 도덕성이 붕괴되고 정치적인 격동기의 기로에선 지금의 시기에 경의사상은 한 줄기 빛과 같은 마중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조식 선생은 경과 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학자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한 예로 자신이 항상 지니고 다녔던 경의 검이라는 패검에 이런 글귀를 새겼다 한다. “내명자內明者는 경이요 외단자外斷者는 의다.” 이 말은 자신을 수양하여 근본을 세운 다음 밖으로 정의를 결단력 있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선생은 두 개의 작은 방울(성성자惺惺子)을 옷고름에 매고 다니며 방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경계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일깨웠다 한다. 이는 선생이 도덕적 학문을 바탕으로 스스로 실천을 중요시하는 생활을 몸소 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점은 퇴계 선생과 차별화가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관에 따르면 우도(경남)에는 조식이 있어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좌도(경북)에는 이황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여 영남의 풍속은 눈여겨 볼만하다고 했다 한다. 또한 실학의 거두인 성호 이익은 대체로 우도 사람들은 선량하면서도 정의로운데 이는 남명의 기풍을 본받아서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이황은 성리학의 본질 즉 학문을 중시하였음을 볼 수 있다. 성리학의 본질인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학문에 심취하였음 을 알 수 있다. 반면 남명 선생은 학문을 바탕으로 생활 전반에 실천에 집중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남명 선생은 학문을 당 시대의 사회 전반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사회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삼았다. 학문을 뛰어넘어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실행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명 선생은 1568년 선조가 관직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이 상소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여 훌륭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간언한다. 서리의 폐단을 지적하며 몸소 그 악의를 처단하여 임금이 악을 미워함을 알려 백성이 죄악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하는 내용의 상소이다. 이처럼 선생은 초야에 묻혀 있음에도 나라를 걱정하고 그 시대의 문제들을 직언하여 임금이 임금으로서 몸소 실천할 것을 주문하였다. 선비로서 꼿꼿한 절의를 보여주는 대담함을 가진 신하이기도 하였다. 어지러운 현 시대에 남명 선생과 같은 절의를 가진 분이 없음에 안타까움이 든다. 쓴 소리 마다 않는 충신이 없음에 절망하고 자리에 연연하여 굽신거리는 녹봉자의 득실거림에 한숨이 절로 난다. 가을 햇살은 한숨으로 내려앉아 시국을 한탄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신이 피폐하고 정치사회의 폐단으로 곳곳이 무너지고 있다. 학교는 교권이 무너지고 형제 사이에 재산 다툼으로 소송이 남발하고 거짓이 난무한 사회가 되었다. 진실이 왜곡되고 시기와 질투가 팽배한 사회가 되었다. 무엇이 옳은지 분간을 할 수 없는 혼탁하고 어지러운 현실이 부끄럽기 거지 없다. 물질문명은 정신문명을 퇴보 시켜 도덕성은 땅에 떨어 질대로 떨어져 버렸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남명 선생님의 실천문학이 더욱 중요시되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이제는 실천을 넘어 행동으로 옮겨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산해정을 나서는 문우들의 발걸음에 무거움이 느껴졌다. 도덕적인 성찰의 시간 속에 앞으로 작가로서의 깊은 고뇌들이 담겨 있는 발걸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겨 남명 선생의 사상을 전하는 문우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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