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정신의 뿌리

지금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군 덕분이다. 우리 장사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적 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적 우두머리의 머리 하나를 베거나 적진 하나를 함락시킨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에서의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幸州大北)이 다소 빛날 뿐이다. 만약 명군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논한다면 그것은 모두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도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명나라에 호소했기 때문에 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위에서 선조는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에게 돌렸다. 정인홍이나 곽재우같은 의병장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민족의 위인이자 '성웅(聖雄)'으로 추앙하고 있는 이순신의 공로조차 다소 빛날 뿐이다'라는 말로 인색하게 평가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왜적을 평정한 명군을, 자신과 자신을 따라온 조정의 신하들이 불러왔다고 강조하고 있다. 선조의 말을 찬찬히 뜯어 보면 결국 자신과 조정의 신하들이 국난을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바로 이같은 분위기에서 조정은 의병장들을 견제했고, 김덕령(金德) 같은 의병장은 '역모를 꾀했다는 구실을 뒤집어쓰고 처형되기도 했다. 사실 선조를 비롯한 집권층에게 의병이란 '양날의 칼과 같은 존재였다. 조선 관군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몰리고, 선조가 피난길에 올라 의주까지 쫓겨갈 때까지는 의병이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명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전세가 역전되는 기미를 보이자 상황은 달라졌다. 정부는 본격적으로 의병들을 통제하려고 시도했고 이제 일부 의병장들은 '토사구팽(兎死狗之: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는 뜻)'을 당하게 되었다. 의병장이란 '사냥개'는 일본군이란 '토끼'를 잡을 때까지만 효용성이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남명학파의 의병장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욱이 곽재우, 정인홍 등은 휘하에 가장 많은 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감시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휘하의 병력을 전부 해산시키고 가야산에 들어가 곡기(穀氣)를 끊고 마치 도인(道人) 처럼 행세하면서 은거했다. 사람들은 그런 곽재우를 일러 '전장에서 오래 떠돌더니 실성했다고 손가락질 했지만 곽재우의 행동은 정권의 감시를 피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정인홍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대부터 광해군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반대자들은 '정인홍이 여전히 병력을 거느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더욱이 선조 말년, 정인홍은 왕세자 광해군을 옹호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선조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귀양길에 오르는 수모를 맛보아야 했다. 국난 극복의 공로자인 의병장들에 대한 대접치고는 너무 심한 것이었다.
곽재우와 정인홍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비로소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고 할수 있다. 광해군은 왜란 당시 직접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볐던 인물이었던 까닭에 왜란 당시 주전파인 정인홍과 곽재우 두 의병장과 정서적으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곽재우는 당시 서북에서 준동하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서북병마사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고, 정인홍은 광해군 정권의 장로(長老)로서 영의정까지 역임했다. 광해군대 남명에게 영의정이 추증되고, 서울 등지에 그를 모신 서원이 건립되고, 그의 위패를 문묘(文廟)에 모시려는 운동이펼쳐졌던 것 역시 이 같은 분위기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남명학파의 의병 활동은다시 한 번 평가절하되었다. 인조와 서인(西人)들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인홍을 처형했다. 남명의 고제이자, 남명 문하의병장의 대표였던 정인홍이,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였다' 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처형당한 뒤 남명 선생도, 남명학파의 의병활동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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