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정신의 뿌리-

3. 남명학파 의병활동의 의의

경상우도에서 시작된 남명 문인들의 의병 활동은 임진왜란 초반, 흩어진 민심을수습하고 장차의 반격과 역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반이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을 이해하려면 임진왜란 초반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임진왜란 초반의 상황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처음 상륙했던 일본군은 이후 승승장구했다. 조선군은 4월 14일과 15일 부산성과 동래성을 내준 이후 지리멸렬했다. 오랫동안 계속
된 대평 시절 동안 전쟁을 위한 준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사시에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와서 지방의 병력을 끌어 모으는 제도인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우선 병력을 제대로 동원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신립(申立) 같은 장수조차 제대로 된 정규군을 거느리지 못하고, 들판에서 김 매던 농민들을 억지로 끌어 모아 병력의 숫자를 채우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수천의 병력을 모았다고 해도 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부분은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도망치기 일쑤였다. 실제 신립이 1592년 4월 말, 문경 새재(鳥嶺)를 방어하기 위해 끌어 모았던 병력 가운데 절반쯤은 적의 북상 소식만 듣고도 전부 도망쳐 버렸다. 신립이 천혜의 요새인 문경 새재를 버리고, 승산이 거의 없던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비하면 일본군은 한 마디로 '준비된 군대'였다.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은 총 병력이 18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고, 그들의 지휘관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는 동안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으며, 병사들은 새로운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은 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조선어 통역관을 대규모로 양성했고, 수시로 정탐꾼들을 풀어 영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조선의 지리적 상황을 탐지하는 등 조선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따라서 준비된 군대와 오합지졸과의 싸움은 그 승부가 애초부터 뻔한 것이었다.
더욱이 당시 경상도 지역의 관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령(守令)을 막론하고 적을 막아 싸우기는 커녕 적이 오기도 전에 도망쳐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던 인물들이 많았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성이 함락되자 마자 도망쳤던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泳), 동래성이 일본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도망쳤던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正), 일본군과의 접전을 회피했던 경상감사 김수(金碎)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 백성들을 이끌고, 그들을 통제해야 할 지휘관들이 먼저 도망쳐 버리자 백성들은 갈팡질팡하면서 피난하기에 급급했고,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군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초반 일본군이 경상좌도를 무참하
게 유린하고, 내륙 깊숙이 진입하여 북상할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창의했던 의병들의 존재, 특히 경상좌도 경계의 경상우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남명 문인들의 의병활동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먼저 정인홍을 비롯한 경상 우도의 남명 문인들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면서 각 지역으로 발송했던 격문(文)의 내용은 인근의 많은 사족과 백성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 그들 휘하의 의병들이 거두었던 승전 소식은 사족과 백성들을 고무시켰다. 왜란 초반 너무나 일방적으로 조선군이 몰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경상도 일원의 패잔병이나 백성들 가운데는 일본군을 '신군(神軍)'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나타날 정도였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경상우도 의병들의 승전 소식은 많은 패잔병들이나 백성들에게 '일본군도 해 볼만한 상대'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어, 자연히 많은 수의 패잔병과 백성들이 도망을 멈추고 의병장들의 휘하로 종군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지방에서도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촉진시켰다. 요컨대 남명 문인들의 의병활동은 흩어져 버린 경상도 일원의 민심을 수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가세하는 백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의병의 규모가 날로 커지자, 의병군의 조직은 더 유기적으로 편제되고 작전 반경도 갈수록 확대되었다. 곽재우, 정인홍 등 남명학파 의병장들의 승전으로 낙동강의 방어선을 잘 지켜냄으로써 경상우도를 보호했을 뿐 아니라 궁극에는 일본군이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했다.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이 보호됨으로써 조선 조정은 경제적으로 다소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일본군은 상대직으로 군량 보급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들을 고려하면 남명학파의 의병 활동은, 이순신 장군의 해상에서의 활약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국가를 보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4. 조정의 평가와 의병장들의 말로

이미 자세하게 언급했듯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아 분연히 떨쳐 일어났던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은 분명 빛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인들에게 실천적인 지식인이 될 것과,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여 문무를 겸전할 것을 강조했던 남명 선생의 가르침이 바탕이 되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명학파의 의병활동은 이후의 정치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백성들 사이에서 의병장들의 인기가 올라가면 갈수록, 공인(公人)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다하지 못한 지방수령이나 관군 지휘관들의 위신은 떨어지게 마련 이었다. 그것은 결국 당시 조선왕조의 행정수반이자 조선군 총사령관인 국왕 선조의 위신까지 흔들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1601년(선조 34) 5월 3일,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인물들을 시상하라고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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