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창우(시인)
송 창우(시인)

낙엽 지고 나무들이 오색 잎을 갈아 있는 이 계절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게 한다. 내면의 번잡함이 일어서일까?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접촉과 마스크 착용의 답답함이 주는 일상의 피로감 누적이 그런 생각을 들게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저런 이유를 뒤로하고 번잡한 생각을 떨치고자 장유사로 발길을 옮겼다. 장유사는 김해시 장유 불모산 대청 계곡에 위치한 천연고찰이다.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열린 창문으로 가을바람이 차갑게 불어온다. 대청 계곡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폭포를 마주한 상점교를 지나니 포장된 좁은 도로가 안내를 한다. 산은 이미 추색으로 물들었고 아름다운 계곡은 가을 가뭄 탓인지 엊그제 내린 비에도 계곡에 길을 낼 정도로만 흐른다. 여름의 웅장함은 없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오르니 선홍빛으로 아름다웠을 꽃무릇은 자취를 감추고 먹이를 찾아 나선 청설모가 반가이 맞아준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니 하늘과 맞닿은 곳에 장유사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불 시간인지 독경 소리가 경내를 엄숙한 분위기로 만들고 산새도 합장한 듯 지저귐도 없다. 사천왕문 오른편에는 지장보살 대불이 위치해 있고 일주문 역할을 하는 사천왕문은 두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에는 사천왕문으로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보호한다는 사천왕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에는 불전 사물중 하나인 지옥 중생을 제도하는 의미를 지닌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을 걸어 종루로 사용하고 있다. 운판은 사찰을 많이 다녔지만, 처음으로 보는 귀함에 감사할 따름이다. 여러 사찰과는 조금 다른 특이함이 있다.
 대웅전 마당을 들어설 때 예불을 돕는 보살님이 계셔 양해를 구하고 평소 가지고 있던 궁금증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사실 방문을 많이 하였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기회를 잡지 못한 터였다. 2층 종루, 대웅전 문의 꽃살문과 매조도, 지붕의 용마루 그리고 마당에 그려진 기와 그림들에 관하여 물었다. 많은 질문에도 웃음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는 두어 가지를 차분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설명을 마치고 사리탑을 제일 먼저 보라는 조언도 해주셨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곳의 제일 보물은 장유화상의 사리탑이라 보물을 먼저 보아야지 않겠냐고’하셨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여겨 고개를 끄덕이고 합장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예전에 양산 통도사를 갔을 때 우연히 불심이 아주 깊은 불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곳에 통도사를 지키는 토지지신을 모신 전각이 있는 줄 아는지?’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런 전각이 있는지 반문을 하였다. 그 불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찰 중에 합천 해인사와 통도사에만 토지지신을 모신 전각이 있다고 하였다. 천왕문을 왼편에 가람각이 그 전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통도사 주지승으로 임명되어 오면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보다 토지지신을 모신 가람각을 먼저 찾아뵙는다는 말도 해주었다. 보살님의 이야기에 공감이 들어 문득 옛 통도사 불자와 만남이 생각났다. 사리탑이 토지지신은 아니지만, 사찰을 창건한 정신이 깃던 곳이라 여겼던 것 같다. 먼 이국땅에서 불법을 가르치셨던 곳이고 수행 도량이기 때문이라 생각해본다. 보살님의 이야기대로 사리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언덕의 축단을 오르니 양옆에 불자들이 쌓아둔 조그만 탑들이 보였다. 각자의 무언의 소원을 빌며 정성스럽게 쌓았을 것이다. 사리탑은 석조팔각 형태로 안내문에 의하면 가락국 8대 왕인 질지왕이 장유암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1500여 년의 오랜 세월 속에 여러 전란으로 암자는 소실되어 재건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탑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 갔다고 한다. 그 뒤 파손된 탑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남의 영토를 유린한 것도 모자라 소중한 문화유산을 도둑질한 그들의 만행이 야만스럽다. 유물은 도둑질 당했으나 그 고유한 정신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장유화상의 정신은 현존까지 남아 장유사를 지키는 근원이 아닌가 싶다. 깊은 불법에 존경과 경외를 담아본다. 혼란하고 분열된 시대에 가벼운 입들 속에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답답한 마음이 하늘을 보게 한다. 낙엽을 떨군 나무들 사이로 쪽빛 하늘이 반겨준다. 무성한 잎들이 아직 매달려 있다면 쪽빛 하늘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내려놓음으로 더 맑은 하늘과 넓은 아량을 가지게 하는 가르침을 자연이 준다. 허황된 욕심이 자신을 무너뜨리니 내려놓고 가라 자연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장유사를 처음 찾게 된 것은 17년 전 아버지가 폐암 선고를 받은 직후였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할 때 온몸의 고통에 몸서리치는 모습을 보며 자식으로 해드릴 것이 없음이 가슴을 후벼 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 속에 문득 세간에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병은 알리고,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병세를 알리고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없는지 묻고 다녔다. 어느 날 지인이 집안에 병자가 있으면 ‘장유사 부처님을 뵈면 좋아진다’라는 말을 듣고 찾은 것이 장유사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날 이후 매주 토요일 이곳을 찾았다. 아버지 병환의 완쾌를 바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이나마 고통이 줄기를 기대하며 대웅전을 찾아 부처님을 뵈었었다. 지나고 보니 아버지 병세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나 자신의 고통을 들기 위한 행위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절박함이 있어 찾았을 것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또한 욕심이 아니었나 싶다.
 대웅전 왼쪽 편에는 재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독성(獨聖)·칠성(七星)·산신(山神)을 모신 삼성각이 있다. 법당 내부에는 합성수지보살상이 모셔져 있고, 삼신탱화와 창건주인 장유화상長游和尙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불법佛法이 높았고 참된 수행으로 스승의 길을 걸었다 하여 장유화상이라 불렀다 한다. 삼청각을 내려오니 넓은 마당을 끼고 확 트인 김해 들녘을 마주하고 앉은 대웅전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보월寶月 스님이 쓰신 힘찬 필치의 편액이 웅장함을 더한다. 타 사찰과 특이한 것은 범상치 않은 대웅전 지붕의 용마루이다. 좌, 우측으로 길게 승천을 미룬 용이 한 마리씩 대웅전을 호위하듯 올라앉아 있다. 그 기상이 범상치가 않다. 법당 내부에는 금동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천불의 지장보살좌상, 불단 좌측에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안좌 해 있다. 세상을 밝히는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 법당 내는 경건함이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은은한 불경 소리에 경도되어 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지난 속세에서의 못난 과오들, 헛된 욕망과 그릇된 가치관 습관들을 참회해본다. 세월의 때만큼 묻은 죄업을 소멸 시켜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을 독경에 실어 본다.

독경讀經

법당의 침묵을 깨우는 종소리
정좌한 일체중생 손끝에 일심을 모아
부처님 말씀 지혜의 빛줄기는
공空이 열반으로 인도한다

세속에 얼룩진 교만을 벗고
공포와 걸림 없는 마음의 때는
마르지 않는 맑은 샘물 되어
참된 마음이 가부좌를 튼다

산사에 내려앉은 청아한 독경 소리
산새도 반야경을 읊조리고
천지 만물 국민 평안 마음 담아
풍경風磬에 걸린 추색은 합장하고 섰다

덧없는 세상 탓하지 말고
허상을 경계하며
괴로움은 집착의 산물이란 깨달음에
열반은 고요한 독경 소리와 앉는다.

 대웅전 전각은 장유를 품고 앉은 탁 트인 넓은 마당에 앉아 푸근한 안정감을 준다. 마당 끝자락 난간에 기와가 하나씩 줄지어 서 있었다. 작은 시화전이 열리는 곳이라고 할까? 초입에서 보았던 보살께서 도반 보살님이 재능기부를 하여 갤러리처럼 꾸며 놓았다 한다. 기와에 그림을 그렸거나 고운 시가 적혀 사찰을 찾는 방문객과 소통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작은 배려가 주는 아름다운 광경이 아닌가 싶다. 자기 재능을 타인을 위하여 내놓은 작은 배려가 큰 감동이 아닐 수 없다. 화려하지 않지만 한 줄 한 줄의 글귀가 마음에 쏙 와닿아 세속에 찌든 정신을 일깨운다. 고운 마음을 가진다면 떨어진 풀씨 하나에도 감사하고 작은 배려에도 감동을 줄 것이다. 장유사에는 감동을 주는 특이함이 있어 산사를 찾은 번민이 한결 정화됨을 가지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찰을 찾아 기도를 한다. 17년 전의 나처럼 누군가의 병을 낳게 해달라고, 수능을 잘 볼 수 있게 100일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장 승진과 아기 점지를 바라는 사람도 유명한 사찰을 찾아 기도를 올린다. 특히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절대 신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찾아 기도를 올리고 향香 공양을 하여도 그 마음이 정갈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사리사욕에 눈먼 마음, 부도덕한 언행, 시기와 질투로 인한 나쁜 행실을 일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존중 없는 사회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으로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고 있다. 배려와 존중이 사라진 탓이 아닐까 싶다. 법구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항상 남을 존중하고 윗사람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움과 편안함과 건강과 장수 이 네 가지 복이 자란다,’했다. 내려놓으면 마음의 평온을 얻어 미움이 사라지고 존중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 믿어 본다. 사천왕문을 나서는 마음에 어느 덧 내려놓음이란 미학의 가르침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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