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정신의 뿌리

2) 정인홍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던 정인홍 역시 남명의 고제(高弟)였다. 그는 1592년 5월 10일 합천의 숭산동(洞)에서 곽준(鄭遂), 권양(權), 하혼(河運), 이대기(李大期) 등 문인과 동지들을 모아 창의했다. 남명의 고제이자 명망있는 학자로서 이름을 날리던 정인홍의 휘하 에는 각지에서 사졸(土卒)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그 수는 곧 수천을 헤아릴 정도로 불어났다.
정인홍은 휘하의 병력을 사수(射手), 창병(兵), 기병(騎兵) 등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편제하는 한편, 관군 출신으로 지휘 경험이 많은 손인갑(孫仁甲)을 맞아다가 지휘를 맡겼다. 정인홍의 의병군은 이후 무계(安溪), 안언역(安安驛)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1592년 6월에 벌어진 고령의 무계 전투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면서 준동하던 일본군의 수송 선단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어 정인홍의 의병군은 초게 전투, 안언역(安安驛) 전투 등을 치르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1592년 10월에 진주성을 방어하는 데도 참가하여 이른바 진주대첩을 이뤄내는데 일조했다.
자신의 전공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제대로 보고하지 않음으로써 공로는 비록 남보다 못했지만 사실 영남의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제일이다.
조경남(趙慶男)이 《난중잡록(亂雜錄)》이란 책에서 의병장 정인홍에게 내린 평가이다. 선조 역시 정인홍의 이같은 공로를 인정하여 상주목사, 진주목사 등의 비중있는 관직을 잇따라 내렸다.
정인홍이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의 나이는 58세였다.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노인이었던 셈이다. 오랫동안 문치주의(文治主義) 분위기에 젖어 있던 조선 사회에서 선비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뭇 대신 칼을 들고 전쟁터로 나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인홍의 의병활동은 그 자신의 결단과 ‘실천하는 선비’로서의 책임을 강조한 남명 선생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도 정인홍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니 그 자신보다 조정이 먼저 그에게 의병을 다시 일으키도록 종용했다. 경상우도에서 근왕병을 불러 모으고, 대규모로 주둔해 있던 명군에게 지급할 군량을 민간에서 거뒤들이려면 정인홍의 명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기꺼이 다시 일어나서 병력을 불러 모으고, 군량을 수집하는 데 힘을 나 바쳤다. 정인홍의 나이 63세 때였다. 노구를 이끌고 군량을 보아 주었던 정인홍의 열성에 감복했년 명군 총사령관 양호(楊鎬)는 선조에게 정인홍을 시상하라고 종용하기도 했다.전란을 맞아 정인홍이 보여 주었던 활동은 단순히 의병장의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의병장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전란 중의 민생과 재정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즉 시장을 열어 물자를 유통시키고, 은광을 개발하여 그를 밑천으로 군수품을 마련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김면의 의병군은 당시 금산과 개령 등지에서 준동하던 일본군을 맞아 유격전을 통해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우현(現) 방어전에서는 거창 지역
비변사가 말하기를 임진년에 거창의 산척 수백 명으로 하여금 우현을 방어토록 했는데 많은 왜적이 여러 차례 진격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거창 이북의 산악 지형에 밝은 산척(尺)들을 규합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구원하자는 계책이었다. 일종의 중상주의(重商主義)적인 대책이었던 셈이다.
당시 선조와 대다수 조정 신료들이 명나라의 은 수탈을 우려하여 은광 개발을 반대하고 있었던 현실을 고려하면 그의 이 계책은 실로 과감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해 있던 명군 지휘관들 대부분이 은광개발과 무역이야말로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경제를 회복시키는 열쇠라고 강조했던 사실을 고려하면 정인홍의 이 같은 계책은 탁월한 경세가(經世家)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 김면

김면 역시 탁월한 역할을 했던 의병장이었다. 남명의 문인이자 이황에게서배우기도 했던 그는 1592년 5월, 정인홍과 더불어 창의를 모의한 뒤 자신의 근거지인 고령 양전동 (量田洞)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그는 주로 거창과 고령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이끌면서 일본군의 진입을 막아냈다. 김면의 휘하 에는 고령과 거창을 중심으로 양반과 농민, 노비 등 지역에서 사회·경제적으로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인물들이 대거 가담하여 향토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면의 의병군은 당시 금산과 개령 등지에서 준동하던 일본군을 맞아 유격전을 통해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우현(牛峴) 방어전에서는 거창 지역의 산악 지형에 밝은 산척(山尺)들을 규합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비변사가 말하기를 임진년에 거창의 산척 수백 명으로 하여금 우현을 방어토록 했는데 많은 왜적이 여러 차례 진격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거창 이북 지역이 끝까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김면의 의병활동에 대한 선조실록의 평가이다. 이후 그는 고령의 무게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전을 거두었고 1592년 10월의 진주성 방어전특에도 의병을 이끌고 참가했다. 조정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592년 6월엔 함천군수, 9월엔 첨지사(僉知事), 11월에는 경상우병사, 이어 11593년 1월에는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의 직책을 제수하기도 했다. 1593년 초 갑자기 병사함으로써 의병장으로서의 더 이상의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당시 조정에서 그 휘하의 병력이 경상우도에서 가장 대규모였다고 파악했고 그에게 의병도대장이란 직책을 내렸을 만큼 그는 비중 있는 의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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