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남명문화제 수필 최우수상 수상작

오미향
오미향

◐이은호 수필가의 수필부문 심사 소감◑

놋그릇은 우리의 관혼상제 전통문화를 이미지화 하여 어머니를 통해 전통사회의 힘든 여성의 역활을 자신으로 옮겨 스스로를 돌아 보며 성찰의 계기를 만들었는 점과 화양 산해정은 산천재 제사에 참석하며 남명 사상연구 기초 맴버로 지역 행사에 다녀온 기행을 기록한 수필로 남명 조식선생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점을 꼽는다.

 

 

이번 해부터 모든 기제사를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됐다. 제기와 제수용품을 사러 남대문시장에 나갔다. 지하철을 두 번 바꿔 타며 내린 남대문 시장 부근에는 장관을 이루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 뿜고 있었다. 신세계명품관을 옆에 두고서도 하나도 기가 죽지 않는 모습이다.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풍습과 아날로그 적인 정서가 배어 있다는 것이다. 제사가 아니었음 찾아오지 않았을 이 곳, 전통시장에서 놋그릇이 눈에 띈다. 볕 좋은 날 외진 곳에 홀로 앉아 놋그릇을 뽀득뽀득 닦아내던 어머니의 그림자가 아로 새겨졌다. 일에 쪄들은 피곤한 기색인 어머니의 그늘진 눈매와 울퉁불퉁한 손마디가 그려졌다. 볏짚으로 뽁뽁 닦아내던 놋그릇이 보기도 싫었는데 시간이 지나 그 그릇을 내 손으로 선택하게 될 줄은.

  말끔하게 닦여진 놋그릇을 쳐다보며 처음으로 준비한 제사가 백번 얘기 한 것 이상의 산교육이 되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울 뿐이었다. 손이 많이 가고 관리를 잘 못하면 안 한만 못하다는 놋그릇의 속성이 가격대비 불편함만 초래할 줄 알았다. 놋그릇은 정성스럽게 닦으면 닦을수록 광채가 났다. 사람의 내면도 채워지면 빛이 난다. 놋그릇 앞에 있으니 마음이 정갈해지고 내면의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놋그릇이 오늘 밤 제사상에 놓여 질 것이다. 은은하게 비추는 기품 있는 내면에는 수천 번 수만 번 두드려 대던 장인의 땀과 숨결이 배여 있다. 때로는 맨몸으로 세상풍파와 부딪혀가며 깨어지고 넘어졌을 것이다. 다시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면서 다져질 것이다. 하나의 놋그릇이 탄생되기까지 수없이 담금질하는 것처럼. 뾰족한 것을 두드려 펴고 약한 것은 강하게 다져질 일이다. 인생이란 큰 그릇을 오늘도 조금씩 두드린다. 메와 탕국을 올리고 제주를 올리며 제를 시작했다.

  나란히 선 삼부자가 영가를 불러냈다. 시골집이 아닌 도시의 밤이 조금은 어색했을까. 유세차를 읊어대는 남편의 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요즘 세상에 제사가 말이 되냐며 불만이 많았던 아들은 웬일인지 잠잠하다. 분위기에 압도당했을까. 아버님의 진지한 태도와 정성 가득한 차례의식이 아들을 생각에 잠기게 한 걸까. 남편과 아들이 제관을 맡아 술잔을 올리고 내리며 의식에 따라 예를 올렸다. 아버님이 굽은 등으로 절을 하고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남편이 뒤를 이었다. 햇복숭아처럼 말랑말랑한 아들의 몸이 미끄러지듯 예를 올렸다. 문지방을 태워 올려 보냄으로 제사는 끝이 났다.
  앞치마를 둘러맨 아들은 뒷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님의 눈빛이 있는데 부담스런 내가 한사코 말렸으나 아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흥겹게 설거지를 했다. 누구보다 엄마가 음식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면서. 손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중국에서 사망한 공자가 왜 우리 집에 부활했느냐며 진보이론을 펴던 아들이었다. 풍습과 관념에 사로잡힌 미풍양속이 구시대 트렌드라며 설전을 벌이던 아들에게 매번 입을 다물어 버렸던 나였다.

  사연을 담아내는 그릇. 그 곳에 어머니가 있었다.
  쓰임이 다한 못이 박힌 체 구석에 방치된 폐목처럼 나도 가끔은 울지도 빼지도 못하고 꺽꺽거렸던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놋그릇이 부딪치는 작은 토닥거림이었다. 8할이 바람이었던 나의 감성을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언제나 뭍을 꿈꾸는 아이, 지구는 나를 위해 자전과 공전을 해야 했다. 말갛게 떠오르는 해는 그 가루를 흩뿌리며 내 주변을 감돌고 달빛 젖은 감성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어야 했다. 다소 엉뚱한 기운에 사로잡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아이를 어머니는 보듬어주지 못했다. 지나칠 정도의 관혼상제의 풍습은 어머니를 옥죄고 딸들의 신파조의 앞날을 부추길 뿐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매번 기일이 가까워오면 양지바른 마당에 앉아 어깨에 부서지는 해 가루를 받으며 그릇을 닦곤 했다. 지푸라기가 바스락 대는 소리를 벗 삼아 그 옆에 쪼그려 앉은 단발머리 아이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우리 향이는 좋은 데 시집가서 이런 일 하지 마라. 조상 모시는 일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좋은 건만은 아니야. 나 혼자 고생으로 족해.”
  그러면서도 물이 덜 닦인 흔적과 거무튀튀한 표면이 말끔하게 닦이면 어머니의 입가엔 밝은 미소가 번지곤 했다.
  “하기 싫음 안하면 되지.”
  순간 시골에 계신 친할머니의 강건한 모습이 떠올려졌다. 그래 벗어날 길은 공부밖에 없어. 열심히 해서 섬을 벗어나는 거야. 애써 등 돌리고 살았던 관혼상제의 올가미는 덜커덕 이른 결혼과 함께 다시 찾아들었다. 유년의 기억을 유폐시키듯 나라는 그릇도 함몰되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은 예쁜 접시에 담겨야 빛을 발하고 눈과 입이 즐거운 법이다. 5월의 햇살, 뭉게구름, 종달새의 노래, 유채꽃의 향이 담겨진 나의 그릇은 누가 매만져 주지 않았다. 가족의 조그만 관심을 받지 못한 체 예쁘게 담아내지도 못했다. 그저 부엌 찬장 한구석에 박혀 숨죽이며 살았다. 두 아이가 크고 나면 좀 달라지려나. 밥풀이 꼬깃꼬깃 뭉쳐있고 김칫국물이 배여 있는 허드레 막사발 같은 그릇이 될까봐 혼자 숨죽였던 지나한 시간들. 일 년에 몇 번 꺼내 져 우아하게 대접 받은 놋그릇에 비하면 나는 막사발 어디쯤에 서 있었던 것일까?

  쨍그랑.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내는 파열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온 거실을 울렸다. 과일을 담아내려다 유달리 약한 나의 왼쪽 손목에서 꽃무늬 접시가 떨어져 나갔다.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어른들이 눈치 챌 까봐 얼른 치운다는 게 깨진 조각을 바로 집었더니 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줄줄 검지를 타고 내렸다. 멍하니 한참 들여다봤다. 거봐. 너 스스로 아끼지 않으니 쟤도 저렇게 떨어져 나가잖아. 순간 모든 게 싫어졌다. 내 앞에 놓인 이 상황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오랜 관성의 법칙에 이끌려 얼굴 빛 하나 찡그리지 않고 철버덕 잘도 집안일을 해냈다. 그릇의 역할을 다 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이루 말 할 수 없다. 자발적 복종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막사발 탓만 할 수도 없었다.

  한 번 깨지면 존재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사기그릇에 비하면 놋그릇은 쟁여놓고 세상사에 잊어버리다 정해진 날이 찾아와 들여다봐도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구의 관심을 받지 않아도 잊지 않고 찾아 주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처럼. 이따금씩 뽀드득 뽀드득 힘주어 닦아주면 과분한 양 매끄런 광택과 겉모습을 유지한다. 청아한 빛을 발하기도 하면서. 우아한 식탁을 위해서 혹은 나처럼 조상의 예를 갖추는 시간에 찾아드는 놋그릇은 옛사람들의 숨결과 향기를 고스란히 내 뿜고 있었다. 지켜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고 바람에 실려 아들에게도 전해질 것만 같았다.

  볕 좋은 날 베란다에 앉아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놋그릇을 하나하나 닦아 본다. 묵은 마음의 때를 벗겨내듯이, 요즘 들어 부쩍 소원해진 남편과의 추억을 되새겨 보며. 지나가던 조각구름이 빼꼼히 얼굴 내밀고 말간 해가 머물다 간다.
  가끔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지인들에게 건네 볼 양이다.
  삶에 놋그릇 하나의 무게를 더해 본다.
김해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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