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정신의 뿌리-

 

선조는 또한 경상도에서는 '()을 읽는 자식은 마루에 앉히고, 무예를 익

힌 자식은 마당에 앉힌다고 지적한 뒤 '전쟁이 일어난 것은 경상도의 책임이

크다'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은 경상도 지역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무예와 병법의 중요성을 강조

, 그를 연마하라고 제자들에게 강조했던 남명의 가르침은 분명 새롭고,

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남명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의 준동 가능성을 경고하고,

그에 대해 강력히 대비하라고 촉구한 바 있었다. 당시 남명이 거주했거나

그의 발자취가 미쳤던 김해, 산청, 합천 일원은 부산, 동래 등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지역이었다. 자연히 당시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왜관(倭館)의 움

직임이나 그를 통해 흘러나온 대마도(對馬島)나 일본의 소식을 접하는 것이

이지 않고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명의 우려

와 경고는 그가 세상을 떠난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생함으로써 현실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남명의 휘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남명학파의 문하생들은 어

느 누구보다도 일찍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지역보다 빠르고, 정확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는 1555(명종

10)에 일어난 을묘왜변(乙卯倭變)을 비롯하여, 일본과의 사이에 크고 작은 갈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던 시대였다. 경제적으로 자급할 수 없었던 대

마도와 일본 서부지역의 왜인들은 조선 정부에게서 보다 많은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호소와 협박을 일삼았고, 때로는 그것이 군사적 알력으로 이어

져 경상도 연안지역의 긴장은 높아져 가고 있었다.

남명은 이처럼 심상치 않았던 당시 일본인들의 동향을 직시하고 있었다.

에 제자들에게, 곧 닥칠지도 모르는 전란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는가 하면 조

정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강력히 응징하라고 촉구하는

등 일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명종(明宗),

조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조정은 일본 내부의 변화에 대해 별다른 주의를 기울

이지 않고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명의 우려

와 경고는 그가 세상을 떠난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생함으로써 현실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남명의 휘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남명학파의 문하생들은 어

느 누구보다도 일찍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2. 남명학파 주요 의병장의 활동

앞에서 언급했듯이 남명의 문인들 가운데 의병장으로, 혹은 의병장 휘하에

서 종군했던 인물들은 대단히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휘하 병력의 규모나 활

약상으로 볼 때 단연 주목되는 인물은 곽재우 (1552~1617)와 정인홍, 김면

(1541~1593) 등이다.

1) 곽재우

곽재우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었다. 남명 선생의

외손서(外孫婚)이기도 했던 그는 난이 일어난 지 열흘 후인 1592423

고향인 의령에서 집안의 노비, 이웃 장정, 흩어진 관군들을 끌어모아 창의했다.

당시 일본군은 이미 김해, 창원, 칠원 등을 함락시키고 현풍 등지로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관군은 변변한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했을 뿐더러 대부분의 지

휘관이나 지방 수령들은 가솔들을 이끌고 도망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경상

도 일원의 백성들에 대한 관의 통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지휘관을

잃은 백성들 역시 우왕좌왕하면서 도주해 버리거나, 상당수는 생존을 위해 부

(附日) 협력자로 변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충군애국(忠君愛國) 정신이 투철했던 곽재우가 보기에 이 같은 지방 수령이

나 방백들의 행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가산을 털어 마

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병력을 확보하는 한편, 붉은 비단옷을 지어 입고 군기

를 만들었으며 스스로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칭하면서 위세를 드높였다.

이에 따라 곽재우의 휘하에는 의령 인근의 삼가(三嘉), 초계(草溪) 등지에서

전직 지방관과 무장들이 모여들고, 병사들의 숫자 역시 급격히 증가해 갔다.

곽재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참모로 활용하는 한편 전체적인 조직의

형태를 전투 수행을 원할히 할 수 있도록 편제했다.

곽재우는 의령의 정암(鼎巖) 나루를 근거지로 삼아 유격전을 벌이면서 일본

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고, 일본 수송선단의 활동을 방해했다. 특히 1592

5월 하순, 함안을 점령하고 정암 나루로 침입해 오던 소조천융경(小早川隆

) 휘하의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는 그가 의병을 일으킨 이후 거두었던 최초

의 승첩이자 의병들의 활약상 가운데 상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이후

에도 곽재우는 현풍, 영산, 창녕 등의 수복전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

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우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것은 결국 우도를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그들의 기도를 좌절시키

는 것이었다.

곽재우 의병의 이 같은 활동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의 창의와

승첩은 우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왜란 초 경상

자연히 의령을 비롯한 우도 일원에서 곽재우의 위신은 점점 높아가게 되었

, 조정 역시 그의 공적을 인정하이 형조좌랑, 성주목사, 진주목사, 방어사 등

의 관직을 잇따라 내렸다. 자연히 그의 휘하로 모여드는 의병의 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였다. 이 때문에 곽재우와, 당시 권위가 실추되고 있었던 관원들

과의 사이에는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한 예로 곽재우는 경상감사 김수(金賥)

와 심각한 알력을 빚기도 했거니와 김수는 곽재우를 조정에 무고한 적도 있다.

. 이것은 의병장 곽재우의 공적과 명망은, 경상감사라는 지방 장관의 견제를

받을 만큼 큰 것이었음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