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선비문화를 찾아서

제3장 임진왜란과 남명학파의 활동

1. 의병 활동의 배경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펼쳐졌던 지역은 단연 경상우도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일본군의 부산 상륙 이후 경상좌도가 처참하게 유린되고 있을 무립인 1592년 4월23일, 의령(宜寧)의 유생 곽재우는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합천에서 정인홍, 김면등이 창의하면서 그 여파는 전국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뿐만 아니라 당시 경상우도의 의병장들이 거느린 병력의 규모나 전투력은 관군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한 예로 1598년(선조 26년) 1월, 조정은 전국의 전투 병력을 조사하여 통계를 낸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관군은 13만 6천 700명, 의병은 2만 2천 9백 명이었다. 그런데 특기할것은 2만 2천 9백 명의 의병 가운데 정인홍이 3천명, 곽재우가 2천 명, 김면이 5천 명을 휘하에 거느리는 등 경상우도의 의병은 모두 1만 명으로 의병 전체 숫자의 50%에 육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과 그 휘하에서 종군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남명의 문인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인 곽재우, 정인홍,김면을 비롯하여 조종도(趙宗道), 전치원(全致遠), 하응도(河應道), 이대기(李大期), 이정(李), 박제인 (朴齊仁), 노흠(盧), 성여신(成汝信) 등은 모두 남명의 문하생이거나, 남명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도와 의병 활동에 참가했던 다른 인물들 역시 직·간접으로 남명과 사제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진주, 함양, 삼가, 안음, 단성, 합천, 의령, 고성, 영산 등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상우도의 남명 문인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에 이처럼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것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1) 남명학파의지역적기반

남명학파의 문인들이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고, 직접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것은 위기에 처한 종묘사직과 지역사회를 수호하겠다는 근왕정신(勤王精神)과 애국심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근왕정신과 애국심만으로 많은 수의 병력을 모집하고, 모은 병력을 적과의 싸움으로 이끌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상우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들의 지역적 기반에 주목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에서 창의한 의병장들은 대부분 이 지역의 대표적인양반가문 출신들이었다. 측 창녕 조씨를 비롯하여 서산 정씨, 현풍 곽씨, 함안 조씨, 고령 김씨, 고성 이씨, 진주 강씨, 합천 이씨, 초계 정씨, 전주 선씨, 장녕 성씨 등의 집안은 대대로 경상우도에서 강력한 지역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
다. 이들 집안은 대개 상당한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여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주들이었다. 또한 혼인 등을 통해 시로 긴밀한 인척관계로 연결되었고, 경상우도 지역의 향교와 서원에서의 활동을 주도하면서 지역의 여론을 이끌고 있는 지도층이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초반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경상좌도가 일본군에게 유린되었던 실상과, 일차적으로 안보를 책임져 주어야 할 관군의 지리멸렬한 상태를 목격하면서 자위적 차원에서 창의활동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의병장들의 지역적 기반이 아무리 강하고, 애국심이 투철했다고 하더라도 특정 의병장 개인의 역량만으로 잘 훈련된 일본 정규군과 맞서승리를 쟁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상우도에서 유력한 가문 출신 양반들의 창의를 부추기고, 그들 서로를 종횡으로 묶어주는 유대감의 원천으로서 남명의 존재와 그 가르침에 주목하게 된다.

2) 실천과 문무겸전(文武兼全)을 강조한 남명의 가르침

남명의 문인들이 임진왜란을 맞아 가장 적극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던 것은 평소 경의지학(敬義之學)의 실천정신을 강조한 데다 무예와 병법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남명 선생의 가르침이 문인들에게 계승되었기 때문이었다. 남명 선생은 평소 제자들에게 병법(兵法)과 국방 문제에 관심
을 가질 것을 촉구했고, 실제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인 곽재우에게는 병법을전수하고, 고제(高弟)인 정인홍에게는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을 물려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같은 남명의 가르침은 분명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선구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조선 사회는 오랫동안 계속된 내외의 평화 때문에 안일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또 조선 초부터 이어져온 문치주의(文治主義)
와 문관우위(文官優位)의 전통 속에서 무비(武備)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잦아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경상도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천시하는 분위기가 강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6월, 선조는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 유생들은 평소 무인(武人)을 이단으로 여겨 그들 대하기를 마치 노예를 대하듯이 한다. 유생들이 오로지 어리석은 고담준론(高談峻論)만을 일삼아 문약(文)의 폐단이 극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경상도가 특히 심하다.
전에 윤탁연(尹卓然)에게 들으니 상주(尙州)에는 활을 쏠 줄 아는 사람이 단지 3명뿐이라고 한다.
이후로는 생원시나 진사시에서 무예도 아울러 시험봐서과녁을 맞춰 합격한 자를 뽑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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