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

2) 국토순례의 길
남명은 국도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례의 길에 오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국토산하의 아름다움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스스로를 시키지 아니하고 끝없이 현실세계와의 긴장 속에서 국토산하 이하 하였다. 일찍이 유두류록 (遊頭流錄) 에서 산과 물을 보면서 인간과 시대 본다. 라고 했던 것에서 이같은 사실은 잘 드러난 바다. 전자는 국토산하를 본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시 우리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을 중시하는 국토산하에 대한 남명의 기본적인 생각을 다시 확인 하게 된다.
남명의 국토순례는 여러 갈래로 이루어졌다. 우선 자신이 살았던 합천,김해,지리산을 중심으로 많은 여행을 하였다. 남명이 산수를 지나치게 좋아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언급한대로 남명은 거기서 역사를 발견하고 그 역사와 관련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매부 정사현(鄭師賢)이 있는 고령, 친구 칠봉 김희삼(金希參), 황강 이희안(李希顔 ), 사미정 문경충(文敬忠) , 송계 신계성(申季誠) 등이 사는 성주나 초계,, 그리고 합천의 대병이나 밀양 등지를 찾아갈 때도 이같은 논리가 적용되었고, 영천(永川)지방이나 나주(羅州)지방으로 여행할 때도 같은 논리가 엄격하게 되었다.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로 국토산하를 인식하면서,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보냈다는 것이다.
남명이 김해를 출발하여 밀양과 청도를 지나 영천지방으로 순례의 길에 오 른 것은 42세경이었다. 당시 청도에는 설친한 친구였던 삼족장 김대유(金大有, 1479-1552)가 운문산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남명은 김대유를 찾아가 ‘백성들 이 복이 없기 때문에 이같은 사람이 누런 패처럼 되었다’ 라고 하면서 안타까 한다. 영천에서는 안증(安嶒, 1494-1553)의 정자인 완구정 (玩龜亭)과 관성 건물인 채련당 (採蓮當) 등 여러 승경지를 둘러본다. 지금의 도남동(道南洞)에 소재한 완구정에서는 ‘동쪽 들판은 강가로 뻗어 아득하고, 북쪽 산은 해 쪽으 로 달려가는 구나’ 라고 하면서 광대한 산하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새련당에서 는 ‘대보는 목련이요 강가에는 옥같은 모래, 푸른 들 파란 안개는 모두 어때 한가’ 라며 산하와 어우러져 있는 건물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명은 완 구정에서 운문산에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던 김대유의 지조를 그리위하며 만 길 운문산의 기이함만 못하다’ 라고 하였고, 채권당에서는 뛰어난 향기를 하는 로 전해주고 싶은 나 땅에는 먼지와 노아 아득하여 그렇게 한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이는 모두 빼어난 경치 속에서도 끝없이 하토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남명 고뇌의 일단이라 하겠다.
 이 순례에서 경주에 들러 옛 신라의 유적을 두루 살펴보기도 했다. 포석정에 들렀을 때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포석정 (鮑石亭)> 이라는 칠런절구는 이렇게 짓게 되었다. 남명은 이 작품에서 ‘단풍 든 계림 벌써 가지가 변했으니, 견휜이 신라를 멸망시킨 것 아니라네,
포석정에서 대권의 군사가 망하도록 자초한 것이니, 이 지경에 이미 임금과 신하도 어쩔 계책 없는 법’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견휜이 후백제를 세우고, 신라를 공격,포석정에서 연회 중이던 경순왕을 자살케 한 사실을 들어 지은 것이라 하겠다. 남명은 여기서 포석정 안에서 극도에 달한 사치와 주연을 벌인 군신 스스로가 신라의 멸망을 초래한 것이지 건휜이 신라를 멸망시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국토산하에 스며 있는 비판적인 역사읽기를 시도하며 오늘을 경계하자는 남명의 의식을 이해하게 된다.
나주로 순례의 길을 나선 것은 덕산에 살던 때였고, 63세 되던 해 여름이었다. 나주에 남명의 자씨(姊氏)가 살았기 때문인데 그 아들이 바로 이준민(李俊民) 이다. 이준민(李俊民)이 모친을 모시고 나주목 (羅州牧) 에 부임했을 때, 남명이 산청 과 함양을 지나 남원, 다시 담양과 광주를 거쳐 나주에 도착했다. 남원을 지날 때는 오늘날 주생면(周生面), 영천리(嶺川里)에 있는 사계정사 (沙溪精舍)에 묵었다. 이 때 집주인 방응현(方應賢,1524-1589) 에게 소반에 비친 두류산을 먹어도 다함없으니 휜 옷 입고 늘 나물 먹는다고 싫어하지 말라고 하면서 청빈을 강조하였다. 담양에서는 식영정(息影亭)에 머물면서 석천 임억령(林億齡, 1496-1568)과 함께 옛날 산해정으로 자신을 찾아왔던 일을 떠올리고 백성들의 고통이 여전하니 경제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국도순례의 과정에서도 끝임없이 곤고한 민생을 걱정했던 남명의 생각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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