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정신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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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그 거점을 마련한 재지교육으로 이어져서 한국의 추로지향이라는 명예를 심어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앞서 기술 한 바와 같이 그는 일찍이 제자의 경전을 숙독하고 생원 진사 시험에서 수차례 급제한 바 있으나, 25세를 기준으로 하여 산림에 처하게 되는데 안연과 같이 자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당시의 지배층이 말로만 떠들 뿐 전혀 실속이 없음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안으로 부패하고 밖으로 왜구가 자주 침몰하는 위기의 시대를 대응하기 위하여 고뇌하였으니, 그 인식과 고민은 그의 독특한 실천정신으로 성숙되어 갔다.
남명 정신이 다른 유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같은 시대적 아픔을 스스로 체득하고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55세에 단성 현감에 제수 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려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아픔을 지적하고 국왕의 덕치를 강력히 호소한 것이나, 69세에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자 머지않아 이 땅에 전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그 방비책을 논구하게 한 것은 그 좋은 증거이다.
공자와 안연의 학문에 보이는 실천적 모습을 읽어내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 남명정신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에는 현실에 대한 손쉬운 타협보다는 맑은 정신과 우뚝한 기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그러하다. 선비의 고절한 기상은 항상 삼가고 근엄하며 정성을 보존하는 가운데 경이 체득되고, 이 경은 밖으로 의와 결부되면서 실천적 역량을 일구어 내게 된다. 한강 정구는 스승의 이러한 정신에 주목하면서 "천지의 순수하고도 강인한 품덕을 받고, 바기개는 천고를 덮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실천정신은 국책을 시정하려는 의도에서 수 차례 올린 상소문을 통하여 나타났고, 〈민암부〉 등의 여러 문학 작품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남명이 굳건한 실천적 교육자상을 확립하고 있음에 대하여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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