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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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김해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씨앗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백월산은 옛 가락국의 땅이요 김해군 관할이었으나 지금은 창원시 복면이다. 백월산을 몇 번 찾아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어떤 이는 백월산이 옛 김해군 녹산면에 있는 명월산이 와전된 것이라고 했다. 명월산의 명월사 주변도 몇 차례 살펴보았지만 차나무는 찾지를 못했다.
필자는 김해의 차 자생지를 찾기 위해 차와 관련된 지명과 구전을 따라 2년 여간 김해의 산하를 누볐다. 동상동 금강사지 주변의 송악산 기슭과 분산 남쪽 자락에서 대규모 군락을 찾았으며 상동면 감로리의 감로사지 주변과 장유면 무계리 바위산 자락에서 차 군락지를 찾아 냈으나, 대부분 신도시 건설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동상동과 상동면의 군락지는 김해시 당국과 시민들이 지키고 가꾸며 사랑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특히 금강곡은 분산의 동남쪽 자락으로 동상동 어복탕 약수터로 분산을 오르는 길 옆으로 형성된 계곡으로 이일대 아래쪽은 동상동이었다. 필자는 1987년 서재골에 자생하는 차나무를 발견하고 어복탕 길을 택하여 금강곡을 살피어 분산을 오르다 금강곡의 개발된 밭의 언덕에서 수 십 그루의 차나무를 발견하였다.

세월에 수 많은 사람들의 낫과 톱에, 그리고 도끼에 잘리면서도 고목이 아름다운 자태로 너무나 우아한 차나무 앞에 천하를 얻은 기쁨으로 가야문화연구회에 보고하고 회원들과 함게 그 기쁨을 나누었던 30여년전의 그 감회를 돌이키며 뛰는 가슴을 감출수 없다. 개발 된 밭을 지나 산 중턱에서 내 키를 내려다보는 크고 건강한 차나무를 만났을 그 때의 그 장면이 가슴에만 남았음이 더욱 아프다. 이제 그 밭들과 언덕의 세월 잉태한 차나무들과 내 키를 내려다 보던 큰 차나무들은 도시화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진실이라고 했던가! 2007년 동상동사무소의 동장과 직원들이 금강곡 끝 자락 분산의 중턱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고 지키고 가꾸고 있으니 애향애민의 큰 실천 일 것이다.
사서로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구형왕이 신라에 귀순하고부터 60여 년간 제사가 끊겼으나 신라 30대 법민왕이 신유년 3월 어느 날 조서를 내려 수로아ᅟᅩᆼ의 제사를 계속하게 했다. 수로왕의 19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해마다 명절이나 술, 감주, 떡과 밥, 차, 과실 등 여러 가지 제물을 갖추고 제사를 지냈는데….”라는 대목이 있다.

『삼국유사』는 “흥덕왕 3년당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이 차의 종자를 가지고 와서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여왕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되었다.”고 적고 있다.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던 차는 언제 어디서 온것일까? 허황옥 공주가 가져온 차가 아니였을까?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서거정은 「금강사」시에서 “장군 차나무도 늙어”라고 노래 했다. 차는 가락국 백성들이 즐겨 마셨고 사랑을 받았던 나무가 아니였을까.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소롯이 담고 있는 『김해읍지』도 「토산조」에 “황차가 금강곡에서 나며 일명 장군차”.라고 적고 있다.
고려의 왕이 김해지방의 차나무를 알고 있었고 수로왕의 제사상에 올려진 차는 김해의 신성한 음식이요 특산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김해인들은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왔다고 굳게 믿고 있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릉 서편 수릉원 입구에서 세월을 머금은 차나무와 ‘다조 보주태후 허황옥상’이 있다. 차나무는 2007년 3월 21일 김해시 농업기술센터 직원들이 육종학자 우장춘박사가 키웠던 것을 이곳에 옮겨심었으니 김해의 보물이 탄생한 것이다.

필자는 나무를 사랑하는 임업과 직원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시민들의 차사랑을 기리고자 그 자리에 다조상을 세워 2010년 4월 27일 가야문화축제 개회식때 개막하였다.
매년 차인들이 헌다로 다조께 감사의 예를 올리고 있다.
차나무에 대해서 감히 어떠한 식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비로움을 다시 찾아보면 열매와 꽃이 가을에 만나는 실화상봉수요 만남 후 열매는 땅으로 돌아가 싹을 튀우고 뿌리를 내려 새로운 차나무가 되고, 꽃은 열매와 이별 후 벌과 나비와 바람을 불러 노닐다 열매가 되어 겨울, 봄,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꽃을 만나는 참 신비롭고 아름다운 식물이다.
우리의 어버이는 왜 딸이 시집갈 대 차씨를 혼수품에 넣어서 보냈을까? 차나무는 그 뿌리가 직근이라 쉬 옮길수 없고 꽃과 열매는 1년마다 만나는 금실좋은 사랑의 나무라 부부가 되면 뿌리를 깊이 내리며 잘 살라는 교훈을 담았으리라.
먼 옛날부터 차로서 만남의 예를 다하고 이별을 했던 차였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자리에도 중생과 만나는 자리에도 차가 있었고 다실, 다방은 궁에서 서민의 생활터전까지 심지어 커피를 파는 곳은 다방이었고 각종 꽃과 열매와 잎으로 만든 음료는 차가 되었으니 차나무의 싱그러운 자태를 나는 흠모하며 사랑한다.
차는 언제부터 사람과 함께 하였을까?
차는 중국의 글자로 ‘차’ ‘다’로 읽으며 사전은 그 뜻을 ‘차풀다’로 적고 있다. 언제부터 사람이 음용했는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차란 글자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차란 글자가 나타난 시기가 곧 사람이 차를 이용 또는 활용한 시기일 것이다. 많ㅇ른 사람들이 차의 고향을 중국으로 보고 있다. 차재배 면적과 그 생산이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수령이 깊은 차나무 역시 중국에 있다. 운남성의 남나산 대차수와 귀주의 대형 고목 야생 차나무다.
차에 대한 최고의 역사서는 중국 당의 육우가 쓴 『다경』이다. 육우는 『다경』에서 “차 마시는 법은 신농씨로부터 알려졌다.”고 했으나 신농씨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다만 『다경』은 차에 대해서는 세계최고의 고서로 육우 시대에 차가 성행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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