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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학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제 실천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남명과 퇴계를 대비시키면서 그 특장을 논의하는 것은 일찍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내암 정인홍이 실각하고 이와 함께 남명학파가 추락하면서 남명과 퇴계에 대한 평가가 그 균형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광해군일기》등에 보이는 기록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의하면 퇴계가 남명과 더불어 한 시대에 예안의 도산에서 강학과 도를 논하여 학문을 크게 천명하고 도와 덕을 이루었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주자라고 하면서, 남명에 대해서는 ‘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선비’라고 평하고 학문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명과 퇴계의 양 문하에 출입하였던 한강 정구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이같은 사정이 적용되었다. 《광해군일기》에서는 정구가 일찍이 남명에게 공부하고 또한 이황에게서 공부하였다고 하면서 그 친구 김우옹이 타계했을 때 지은 만시 한 구절을 소개하였다.

퇴계의 정맥, 산해의 고풍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영남에는 선비가 많은 곳인데 퇴계 이후로는 참된 선비로서 우뚝하게 사표가 될 만한 자가 없다고 하고 있다. 퇴계가 남명의 학문을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영남을 거론하면서 퇴계만을 지칭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정치적 성패와 학문적 평가가 밀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퇴계가 남명의 학문 성향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영남 사람에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이같은 평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면에 두 분이 마음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이면적 허여를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다양하다. 역시 《광해군일기》에 퇴계가 남명과 더불어 비록 왕래하며 상종하지는 않았으나, 서로 허여하고 그 훌륭한 점을 취한 것이 자못 깊었다고 하면서 주고 받은 편지나 들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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