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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도 우리 학문과 문화 지킨 '월봉서원'인류역사의 귀한 문화재
강산문화연구원 누리봄 자원봉사원들이 경남 문화재자료 제 464호로 지정돼 있는 장유 월봉서원을 방문해 역사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인류역사의 귀한 문화재
 영·호남 사상·문화적 소통
 도심 속 유학의 맥 이어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설립된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서원 9곳을 묶은 ‘한국의 서원’은 인류역사의 귀한 문화재로 세계에 알려졌다.

 '한국의 서원'에는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이 포함됐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우리 민족의 교육 전통을 간직한 서원이 세계유산이라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1543년(중종 38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그 효시이다.
 

덕정로77번길 11-16에 소재한 월봉서원의 전경.

 김해도 서원이 있다. 김해시 덕정로77번길 11-16에 위치한 월봉서원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4호로 지정됐다. 월봉서원은 조선 중종의 5남인 덕양군 문중의 강학소이다. 상량문에는 ‘上之開國五百二十六年丁巳年(상지개국오백이십육년정사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조선이 개국된 후 526년인 정사년 즉, 서기 1917년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917년이라면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후 7년이 지났을 때다. 일제가 식민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기초 작업을 한 시기였다. 우리의 문화가 언어가 탄압받던 때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월봉서원은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지키고 이어나가기 위해 세워졌다. 월봉서원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또한 월봉서원은 영남과 호남의 사상적 교류와 문화적 소통의 역할을 했다. 월봉서원의 학맥은 율곡 이이로부터 시작되어 우암 송시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이다. 당시 영남지역에는 영남학파가 주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었기에, 영남지역에 기호학맥의 서원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상징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월봉서원은 율곡학파의 거목인 월헌 이보림(月軒 李普林·1902~197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유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1984년 사당인 명휘사(明輝祠)를 세우면서 월봉서원으로 개액하였다.

 월봉서원은 한 시대 전의 서원으로 그쳤던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조선시대 유교와 한학교육을 하며, 김해 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도 제향의식과 전통적 서당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화재 이우섭(1931~2007)선생도 아버지를 따라 평생 고향에서 월봉서원을 지키면서 한학을 가르쳤다. 또한 2005년 5월에는 성리학 관련 글과 한시, 금석문 등을 정리한 <화재문집(華齋文集·전27권)>을 출간하는 등 4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현재는 화재 선생의 막내아들인 이준규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를 통해 월봉서당을 6대째 운영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월봉서원은 근대기 건축물이지만 어느덧 지어진 지 100년이다. 전반적인 특징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이며, 정면의 툇마루 및 그 뒤의 대청과 실내공간을 적절히 배분하여 공간 활동을 극대화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호로는 세살문과 불발기분합문 등 다양한 형태를 조화롭게 배치하여 공간구성을 다채롭게 연출했다. 건축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공간 안에서 실제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유교와 한학 교육이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월봉서원을 둘러보는 자원봉사자들.

 월봉서원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도심 한가운데 있는 전통적 공간에 감탄하게 된다. 월봉서원은 장유 덕정마을에 있다. 큰 정자나무가 있다고 해서 덕정(德停)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마을의 역사는 25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참판을 지내다가 낙향한 소요재 이춘흥(李春興) 공을 입향조로  전주이씨 가문이 이곳에 터를 잡고 일가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마을의 중심에 월봉서원이 있다. 월헌 이보림과 아들 화재 이우섭의 학문과 삶이 스며든 일신재, 운강재 등을 보고 있으면 옛 전통마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40여 호의 일가들이 마을 앞의 넓은 논에 농사지으며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넓은 들판에는 현재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넓은 들판 한 가운데서 마을을 지켜보던 정자나무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 조성된 공원으로 이식되었다. 원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100여m 옮겨져 다시 뿌리를 내린 정자나무에는 화재 선생이 그 유래를 밝힌 비가 서 있다. “예전부터 이 마을에 우환이 있을 적에 이 정자나무 아래로 와서 기도를 올리면 영험을 보곤 하였다. 그래서 이 동리의 수호신으로 삼은 적이 오래다”라는 내용이 화재 선생의 한글 친필로 새겨져 있다.

 대단지 아파트 도로 건너편에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는 월봉서원은 마치 세월이 비켜간 듯하다. 월봉서원과 일신제 등 마을의 고가들도 사람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다. 도로 건너 아파트 단지의 노년층들과 출가한 자녀의 집을 방문한 어르신들이 도로를 건너 찾아와 구경도 한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하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살아있는 교육기관, 월봉서원

 월헌 선생이 머물렀던 ‘일신제’의 방은 평소에는 닫혀있지만, 필자는 몇 년 전 일신제에 들어가 보았다. 일신제 건물도 지은 지 80년이 지났다. 한학자이며 훈장이었던 월헌 선생의 방에는 묵은 책 내음이 났다. 방안에는 월헌 선생이 친필로 쓴 글, ‘만물정관 개자득(세상의 모든 사물을 고요히 바라보고 문득 서서히 깨닫는다)’을 비롯해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태극'이 그려져 있다. 평소에 앉으시던 자리 뒤편에는 방 만한 크기의 다락이 있다. 월헌이 책을 보관하던 ‘장서실’이다. 장서실 아래에는 ‘일신제서적목록’이 붙어 있다. 작은 글씨로 책 제목과 권·질의 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총 2천508책의 목록이다. 책 한 권 한 권을 소중하게 여긴 한학자의 세심함이 배어있다. 적지 않은 권수의 책이며,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목록이 있다는 것도 소중한 기록이다.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 일신제와 월봉서원은 그 말이 어떤 뜻인지 말해준다.
 
 월봉서원 대청마루에 앉으면 옷깃이 절로 다듬어진다. 어디선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글을 잘 읽는 선비가 좋은 글귀를 읽으면, 글자 한 자 모르는 백성이라 해도 슬픈 대목에서 눈물을 절로 흘리고 즐거운 대목에서는 미소를 짓는다고 한다. 월헌과 화재 선생이 글을 읽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도 월봉서원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준다. 월봉서원은 전통이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월봉서원이 주는 공간의 단아함, 서원에 머무는 시간의 고요함은 겪어보아야 알 수 있는 특별한 정서이다. 아름다운 향기가 떠돌고 있다. 고요히, 천천히 그 향기를 느껴보길 권한다.

박현주 북 칼럼니스트.

김해일보  gimhae1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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