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김해 남명 선비정신 문화를 찾아서
명종조의 남명기사와 사신의 평가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사관은 언급하기를

 “한 가지 조언을 구비한 사람만 구하려 해도 오히려 합당한 사람이 드물겠는데 하물며 여섯 가지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온 세상에서 구한다고 해도 역시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 얻어낸 이 여섯 사람(조식, 이항, 성운, 남언경, 한수, 김범 등이었다)은 이러한 선발에 뽑혔지만 과연 여섯 가지 조언을 다 구비한 사람들이겠는가.”(1566년 명종 21년 5월 23일)

 “사림의 생원이나 진사 중에서 여섯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은 ①경서에 밝고, ②행실이 바르고, ③순진하고, ④성실하고, ⑤노숙하고, ⑥온화한 사람을 선발하라(명종 21년 7월 19일 무신조)”고 하여 원래는 왕의 자손들 중에도 가르칠 만한 사람을 뽑기 위해서 이조와 예조에 지시하였으나 유일천거의 조건에 적용시킨 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조건은 왕이 전적으로 신임할 수 있는 신하를 선발하겠다는 의도로 보여지며, 명종이 왕손들에게 뒷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을 미리 양성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명종 21년 8월 28일조).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조건이므로 신하들에게 설득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명종 21년 7월 19일 이조판서 민기, 참판 정송영, 참의 박응남 등이 제의하기를, “여섯 가지를 다 구비한다고 하면 재능과 덕이 다 완비된 사람인데 이런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없으니 그건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쓸만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선택해서 써야 할 것입니다.”고 하면서 전번에 경연관이 제의한 성수침, 이희안, 조식, 성제원, 조욱 등 다섯 사람은 시골에 묻혀 사는 선비로서 추천되어 6품 벼슬에 등용되는데 왕의 특별지시에 따르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사관은…그런데 전번에 여섯 사람(이항 등)을 써서 올릴 때에 미처 상세히 밝혀서 제의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사람들을 매번 여섯 가지 조건이 구비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비단 그 본인들이 감히 그런 사람으로 자처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공론들도 역시 그런 칭호는 적합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비하였다’는 말은 빼고 단지 ‘경서에 밝고 품행이 바르다’는 말만 들어서 지시를 받아 시행하게 하기 바랍니다.

 사관은 ‘여섯 가지를 구비한 사람에 대해 말한다면 처음부터 임금의 지시를 심상히 대하였기 때문에 그 써서 올린 사람들이 비록 모두가 한때 이름있던 사람이기는 하지만 자못 정확한 토의와 문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뒤 임금이 대단히 우대를 하였고 공론들은 그것이 타당치 못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조에서 이렇게 제의한 것이다.

 경서와 품행이 바른 선비를 거론한 경연관에 대한 각 인물의 부연 설명에서 조식의 품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정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조식은 품행이 방정하고 결백해서 두 왕에 걸쳐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서릿밭 같은 기개는 늙어갈수록 더욱 꿋꿋하였으며 사람들의 잘못을 용납할 줄 몰랐다.

 세상을 지나치게 거만스럽게 대하였으며 일상적인 말에서도 풍자가 많았다. 대체로 숨어 살면서 할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늘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고 하였다. 중종 때에도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이때에도 여러 차례 6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는 글을 올리고는 나가지 않았다. 퇴계 이황이 편지를 보내 벼슬에 나갈 것을 권고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았다.

 한 번은 “산해정 속에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던가, 황각에 사는 늙은이의 온 볼에 흰서리 내렸어라, 반생에 3번씩이나 조정을 찾아갔건만 임금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네”라는 시를 지어 이희안에게 보냈는데 여기서 말한 ‘산해정’은 식의 정자 이름이고 ‘황강’은 이희안이 거주하던 고장 이름이었다.

 이 시 역시 희안을 풍자한 것이다. 그의 정자는 김해의 해변가에 있었는데 스스로 남명처사라고 불렀다.

 늘그막에 두류산의 깊은 산골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자주 때(음식)을 거르곤 하였으나 태연자약하였다(권 33, 명종 21년, 7월 19일).

김해일보  gimhae114@naver.com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해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