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원장/남명학박사

1561년(명종 16년) 4월 10일

 “바른말을 올리라고 요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바른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며,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방도는 진심으로 요구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사실상 임금이 자기 심금을 열어 놓고 공정한 도리를 발양시켜 간하는 말을 즐겨 받아들이는 실속으로 평소부터 신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갑자기 재변에 부닥치고 나서 아무리 간절한 지시를 내려 당면한 문제를 타개할 대책을 들어보려고 하여도 그 누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가 귀에 거슬리는 앙갚음을 받으려고 하겠는가.

 지금 바른말을 달가워하지 않는 임금의 태도는 사람들을 천리 밖으로 멀리 하고 있다. 대간들은 바른말을 하는 책임을 지니고도 입을 다무는 것을 유일한 방도로 삼고 재상들은 좋은 의견을 제기하고 옳지 않은 일을 말리는 것을 책임지고 있는 데도 둥글둥글 살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우는 판이니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저 시골 오막살이 속에선들 생각을 가지고 말하고 싶어하는 선비가 왜 없겠는가.

 그런데 전번에 영남 사람인 조식은 임금이 바른말을 올릴 것을 요구하는 기회에 글을 올렸다. 그의 의견으로 말하면 남의 잘못을 기어이 꼬집어 내어 정직한 이름을 내려는 것도 아니었는데 받아들이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충직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시골선비들까지도 모두 바른말을 하는 것을 삼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아침 저녁으로 바른말을 올리라고 요구하는 지시를 내리고 있지만 그것은 빈 종이에 불과한 것이다.

 바른말을 하는 관리들도 오히려 배척을 당할가 봐 겁내는 판에 누가 감히 임금의 위엄을 거슬리려고 하겠는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데서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 아. 통탄할 노릇이구나.”

 “조식의 상소는 목숨을 내건 직언이었으므로 언어가 날카롭고 내용이 간절하며 듣는 당사자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런 글에 대한 논평을 개인적인 우정으로 친근한 사이에서 논평한 성수침의 말에 의하면(명종실록 제29권 12월 26일 성수침 사망과 관련하여 사관이 기록) “젊었을 때 조식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였는데 조식이 벼슬을 사양하여 임금에게 올린 글이 아주 과격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오래도록 건중을 만나보지 못하였으므로 그동안 원만해졌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상소문을 보니 예리한 기개가 너무도 드러났다. 수양한 것이 아직도 다 원만하지 못하니 그가 수양한 정도를 알 것 같다”라고 하여 조식이 남의 잘못이나 나라의 그릇된 실태를 곧바로 받아들여서 가차없이 비판하는 강직한 성품을 엿 볼 수 있다.

 왕의 이름에 저촉되는 말을 한 시골의 선비에 대하여 엄한 말로 추궁하고 난 후 왕의 주변에서 바른말을 간하는 대신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많았다.

 이로 인해서 왕의 곁에서 날마다 ‘옳습니다’라고 대답만하는 관리가 늘어나고 바른말로 간쟁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천리 밖으로 멀어지고 있었다(1564년 2월 10일 참조).

 이러는 사이 서쪽 변경에 요소가 있고 정사가 날로 혼미하자 홍문관 부제학 윤위중 등은 왕에게 ‘치도’를 논한 자리에서 조식을 지칭하면서 ‘덕 있는 사람을 떠받들고 도리를 좋아하여 시골에 묻혀 있는 선비를 다 찾아내어’ 어진 선비를 구하여 그들의 좋은 말로 인해서 모든 일들이 다 잘 다스려진다고 하여서(1566년 명종 1월 7일) 당대에 가장 어려운 문제로 “진실된 인제는 조식과 같은 사림의 선비를 발탁하므로 정사의 업적이 밝아진다”는 조야의 여론을 밝혔다. 이러한 여론이 왕의 심리를 압박하자 왕은 지시하기를 “나는 이전부터 집안 사람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 그래서 어제 스승을 골라 가르쳐 준 데 대한 말을 한 것인데 다시 깊이 생각해 보니 이제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내서는 안되겠다. 단지 여섯 가지 조건을 구비한 사람을 해당조에서 골라서 적당히 쓰게 함으로써 장려하고 고무하여 분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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