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가야의 종주국 가락가야

김종간 향토사학자.

서序

 "…가야의 문화는 낙동강의 문화가 아닐까? 1천3백리를 흘러오는 낙동강이 마르지 않는 한, 가야사는 결코 어둠에 묻혀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가야의 역사와 문화의 모태인 낙동강이 쉬지 않고 흐르기에 가야사의 어둠은 꼭 밝혀질 것이다.…"

 1987년 세상에 내놓은 『가야의 얼을 찾아서』라는 졸서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구석기 신석기를 거치고 삼한시대, 사국시대, 고려와 조선을 살고 살아 대한제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까지…. 우리는 때로는 자랑스럽고 때로는 부끄러운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중국과 몽골이 침탈하고 프랑스와 미국,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도 겪었지만, 우리 선조들은 늘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이 나라를 지켰고,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일본이 임나일본부를 앞세운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 억지주장 등 없는 역사를 만들어 낼 때마다 저는 "그래도 가야는 늘 여기에 있었다."고 바보스럽게 외쳤습니다.

 어떤 학자는 "가야는 들먹이면 들먹일수록 미친 것"이라며 냉소했고, 다른 이는 "신비의 역사"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가야를 외면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외쳤습니다.

"가야는 여기에 있었고,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았고, 사료도 유적 유물도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가야를 찾아 나섰습니다.

 1985년 가야문화운동을 주창하며 이듬해 민간 역사단체인 가야문화연구회를 창립하였고, 1987년 가야유적 답사기『가야의 얼을 찾아서』를 출간했던 것입니다. 1989년 2월에는 전국 최초의 역사문화전문지 격월간 『가야』를 발행했습니다.

 1988년 여름에는 역사 이래 최초로 중국, 일본, 한국의 가야사 연구학자들을 모아 가야사 국제학술대회를 개최, 한반도의 고대사 바로세우기에 불을 당겼습니다.

 일부 고고학 교수들이 보물처럼 감추어 왔던 유물자료들이 『가야』지면을 통해 세상에 나왔고, 김해지역의 개발 붐으로 고분발굴이 늘어나면서 가야사 연구의 열기도 점차 달구어졌습니다.

 필자는 김해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 무엇보다 가야사 복원과 가야문화도시 조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시대를 이은 우리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시대'가 아니라, 가야를 포함하는 '사국시대'였다고 바로잡아 역사교과서에 명문화할 것과, 우리 고장 김해의 대동면에서 도굴된 '가야 기마인물형 토기(국보 제 275호)'를 경주가 아닌 김해박물관으로 귀향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원화 돼 있던 가락문화제와 가야문화축전을 가야문화제로 통합해 내실을 기했습니다.

 구지봉에서 대성동 고분군을 잇는 가야사 2단계사업은, 3개 학교와 교육지원청 이전 확정 등 복잡한 난제를 풀어놓고도 더 이상 추진을 보지 못한 채 물러난 아타까움도 큽니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께서 가야사에 높은 관심을 보여 그 연구복원사업이 '국정 100대 과제'에 포함된 덕분에,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감격과 감사한 마음으로, 가야의 역사가 생활 속에 뿌리 내려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밝히는 역사의 등대가 되어 주기를 희망해 봅니다.

 우리 함께 가야의 실체를 찾는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필자는 320년 넘게 가야의 길을 걸으며, 힘들 때마다 낙동강을 찾아 그 유장한 흐름 위에 '구지가' 한 자락을 띄워 보곤 했습니다.

 구지가는 가야의 백성들이 왕을 추대하며 부른 노래지만, 고려, 조선의 정승부터 포의의 선비까지 수많은 시인들도 가야의 역사와 경승을 노래했습니다. 그 노래들을 음미하며 걷다 보면, 멀고 아득한 가야의 길도 걸음마다 다시 힘이 솟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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