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이홍숙 문학박사/창원대 외래교수

 당시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지자 성과 궁궐은 폐허가 되었으며 왕명은 끊어졌고 강토는 휩쓸려 백성들의 문드러진 삶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또 악독한 저놈들 세력은 불이 치솟고 물이 덮치는 듯했다. 수많은 군함이 바다를 둘러쌌고, 끝도 없는 전깃줄이 각 지역을 이었다. 사해가 이웃집처럼 가깝게 되고, 만리가 지척이 되었다(통제되고 감시받고 봉쇄된다는 의미). 도, 군, 면, 리에 촘촘하게 군대가 주둔하여 비에 목욕하듯 대포알을 쏘았고 바람결에 머리를 빗듯 창검으로 베고 찔렀다. 벼락같은 포성이 날로 심해졌고 이 땅에 숨 붙이고 사는 사람은 살아남을 이가 없었다.
         -(중간생략)-
 주둔하던 병력이 공격해와 좌우 손을 묶고 대검을 바로 찔렀다. 두 다리와 한쪽 옆구리에 살이 찢어지고 피가 쏟아져 옷을 적시고 자리가 흥건했지만...(이하생략)
 
 이는 진영의 애국지사 김용호 선생의 후손이 간직해 오고 있는 선생의 행장의 한 부분이다. 행장(行狀)은 고인의 행적을 간명하게 써서 죽은 사람을 살펴볼 수 있도록 작성한 것이다. 명문(銘文), 만장(輓章), 전기(傳記) 등에 자료로 제공 된다.
 
 후손 김병철씨에 따르면 할아버지 김용호의 만세운동 이전의 행적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측컨대 가족들 몰래 비밀리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동을 하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영민하고 기개 높은 선비였던 그는 일제의 침략 앞에서 그는 치미는 충심과 분노를 가졌고 태산같이 높은 저들의 힘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앞장서서 시장 사람들을 이끌어 크게 만세를 불렀다.
 
 죽음을 불사하며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그에게 일제는 병력을 동원하여 좌우 손을 묶고 대검으로 바로 찔렀다. 두 다리와 한쪽 옆구리 살이 찢어지고 피가 쏟아져 옷을 적시고 앉은 자리가 피로 흥건하였다.
 

 참으로 잔혹한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일제 만행의 실상이다. 나라를 빼앗았다는 말 속에는 저와 같은 잔혹성이 함축되어 있다.
 
 이후 선생은 부산 감옥으로 이감되셨는데 ‘내 어찌 너희 비루한 놈이 주는 음식물을 먹겠느냐!’하고는 단식하셨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식으로 연명하셨으나 칼에 베인 상처 독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하여 병마가 날로 악화되었다. 건강을 해쳐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저놈들도 ‘김용호는 진정한 의인이다’라고 하면서 고향으로 호송하여 돌려보냈다. 감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곧바로 돌아가셨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이러한 잔혹상은 한 선비가 지은 행장에 전해 온다. 갑술년(1934)년 10월 하순 벽계산인 경주 이씨 회당(悔堂)이라는 선비가 김해군 진영면 사산리 선생의 본가에 머물다가 사연을 듣고 쓴 행장이다. 이 분이 누구인지는 좀 더 알아 봐야 하겠다. 혹시라도 경주 이씨 문중에서 아는 분이 나타나 주었으면 한다.
 
 1934년이면 식민통치가 극에 달하던 시점임에도 용감하게 선생의 뜻을 사적으로 남기고자 행장을 지으신 것이다.
 
 만세운동하다가 감옥으로 끌려가신 할아버지를 자랑으로 여기며 장롱 깊숙이 행장을 간직해 오신 유족은 할아버지가 당하신 잔혹한 모습을 접하고 얼마나 마음이 찢어질지 모르겠다.
 
 행장을 번역하는 내내 가슴이 아려오고 당시의 현장이 떠올라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구나 조금의 반성도 부끄러움도 없는 일본, 잔혹하기 이를 데 없던 식민지의 야만적 행적을 몇 푼의 돈으로 흥정했다고 책임을 다했다는 저들, 저 야만적 행각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저들의 식민지적 야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똑같이 당하지 않기 위해 단결된 마음으로 대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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