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용 가야스토리텔링 협회장

박경용 가야스토리텔링 협회장

 기묘년 12월 28일

-출가 입산하다

 

 나의 결심을 어마마마께 말씀드렸다. 어마마마는 나를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리신다.

 “유민아 내 딸아! 너를 기를 때 얼마나 애지중지 길렀는데……이렇게 될 줄이야.”

 나도 어마마마를 안고 한없이 울었다. 어마마마는 눈물을 닦으시고 기왕에 그런 결심을 했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며 한 가지 청이 있다고 하시었다. 나는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황후사로 가려던 것을 궁궐이 보이는 임호산으로 정했다. 역시 경운대사의 안내를 받아 임호산으로 가기로 하였다. 스님들은 나의 신분으로 그곳에 머무르면 불편해 할까 하지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앞에 신분의 높고 낮음이 무슨 문제가 될까.

 궁궐이 있는 신답 편을 향하여 절을 하고 국태민안을 기구하고 부마와 여의 낭자의 넋을 위해 극락왕생을 기구할 것이다. 이 밤이 지나면 내일 아침 일찍 궁궐을 떠날 것이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더 높이 걸리어 있는 것 같다.

 

가야 고도 지명 유감

 세월과 함께 본래의 의미가 잘 전해지는 곳도 있지만 굴절되어 전해지는 곳도 적지 않다. 가야 고도 김해의 지명이나 역사가 뭔가 잘못 전해져 내려가고 있어 몇 자 적어 본다.

 지금의 ‘해반천’은 옛날 김해 토박이들은 ‘하반내’라 불렀다.

 가야시대에는 구지내라 불리웠던 하반내는 고지도에서도 하반천으로 적혀 있는데 언제 어떤 연유인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근래 와서 해반천으로 불리고 있다. 이 물은 삼계에서 내려오는 냇물인데 바다 해를 쓰는 것이 이치에도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내동은 김해 토박이들은 ‘소바우’라 불렀다. 쇠바위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철기문화가 앞섰던 가야문화와 연관된 쇠바위는 가야의 역사성을 말한다. 이걸 근래 와서 소바우의 소를 동물로 생각하여 한문으로 우암이라 하고 초등학교 교명으로도 쓰고 있으니 문제이다.

 지금의 연지못도 불과 30여 년 전에는 신못 즉 신의 못이었다.

 바로 곁의 구지봉에서 김수로왕의 탄생신화를 담은 신의 뜻을 맞이한다는 영신가인 <구지가>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가야의 역사 향기가 풍기는 못이다. 이것 역시 김해토박이들은 실못으로 불러왔다. 여기에 연지라는 다른 지역에서도 너무나 흔하디흔한 이름을 붙인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금천부락도 옛날에는 쇠내라 하였다. 이 또한 가야의 철기문화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예부터 선비들이 심신을 단련하며 공부했다는 서재골은 각 지방마다 있다 왔는데 현재 만장대 기슭 선비들이 공부했다는 서재골 위에 10여 년 전 어떤 사람이 서재골이 서쪽으로 향한데 비해 남쪽으로 향했다며 남재골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황당한 느낌이 든다.

 사실 그곳에는 고려시대에도 금강사가 있어 금강골이란 이름이나 신령천의 옛 이름과 관련하여 신령골이 더 역사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수릉원이란 이름도 바로 옆에 수로왕릉이 있고 대성동 고분이 있는데 또 수릉이 있어 너무 무덤이라는 릉이 많아 답답한 느낌이다. 좀더 생동감 있는 이름이 없었을까, 아쉬운 마음이다.

김해는 가야문화 재정비사업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공사를 하고 있다. 가야문화라는 역사성에 걸맞는 본래의 이름 찾기에 마음을 써야 될 것이다. 겨우 20~30년 전만 해도 가야고도의 향기가 짙은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소영웅주의가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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