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논설위원

한상규 논설위원

  지난 5월 24일 김해 사충단 표충회(四忠壇 表忠會)가 주관하고 김해시가 후원하는 임진왜란 때 김해지역을 방어한 의병장 네 분의 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엄숙하게 진행됐다.

 이날 사충신의 문중을 비릇하여 경상남도 유림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날 필자가 참석해 느낀 바를 글로 남기고자 한다.

 선조 25년(1592) 음력 4월 13일 총 병력 20여만 명의 왜군이 부산을 통해  3진으로 나누어 조선의 강토를 침입 유린하는 큰 전란이 발발해 이후 7년간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준 치욕적인 흔적을 남겼다.

 이러기까지 조정에서는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사전 준비에 소홀한 실책으로 국토가 유린당하게 됐다. 선조는 4월 30일 새벽 도성을 버리고 떠나 5월 1일 개성으로 몽진했다.

 당시 김해성을 공략한 왜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3진영은 4월 14일 다대포를 경유하여 가락(죽도)에 도착해 영남 내륙의 관문이자 호남으로 이어지는 군사 요충지인 김해를 공격했다.

 무방비 상태의 김해진영은 관군 50여 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방어하지 못하고 부사(府使) 등 관원이 도피하는 지경에 이르자 군민 500여 명을 규합해 김해성 방어에 나섰다.

 그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의병장이 송빈(1542~1592), 이대형(1543~1592), 김득기(1549~1592), 류식(1552~1592)등 네 분이 구국충의로 최선을 다하다 전장에서 순국했다. 

 이들에 대한 공적은 임란 후 1600년(선조 33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조정에서 품계와 증직 벼슬을 내렸다. 후손들과 지역주민의 뜻을 반영해 '사충단(四忠壇)'을 세우고 이들에 대한 향사를 매년 음력 4월 20일 순국한 날을 정해 거행하고 있다.

 네 분의 의병은 임란 최초의 의병으로 밝혀졌으며, 이들은 망우당 곽재우보다(조선왕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에, 4월 24일 의병 한 최초의 의병장이라고 기록) 5일 정도 앞서 김해성을 사수하다가 순절한 충신이다. 


 과거의 역사는 고증을 통해 현 시대에 적합하게 적용하고 고증이 불가할 적에는 역사를 새롭게 정립하여 기록할 수 있다. 역사는 時間(시대) 空間(사실)에서 인간(人間), 즉 삼간(三間)중에서 인간이 중심이므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역사다. 본 선양사업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충의의 정신을 계승하는 계기를 마련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도성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선조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책은 계속 이어졌다.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 명나라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됐을지 모른다.

 필자는 김해 역사의 3대 정신문화를 김수로왕과 조남명, 임란 사충신이라고 본다. 사충단에서 향을 피우고 넋을 위로하는 제향의식과 더불어 김해시민 모두가 알고 기리는 역사적인 정신문화로 기억되길 원한다.

1년에 한번만이라도 사충신의 의로운 정신을 간직하는 계기가 되도록 관에서는 이날을 기리는 의미에서 아침 조례에 전 공무원에게 알리고 민에서는 의병출정식을 재현하고 교육 기관에서는 학생들에게 짧은 훈화라도 알리는 뜻깊은 기념일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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