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우리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나 말을 억지스럽게 하여 자신의 조건에 맞추려고 하는 것을 비유하는 의미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는 사자성어를 꼽습니다. 이는 송나라 때 청초의 『통지총서』에 소개된 말로써, 다른 사람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과 고집만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가에서도 금강경의 해석을 두고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강경은 선불교를 주창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입니다. 소의경전이란 신행(信行)을 비롯하여 교의적(敎義的)으로 의거하는 근본 경전을 말합니다. 이러한 금강경이 '마음이 곧 부처(즉심시불)'라며 마음속에서 부처를 찾으라던 마조선사의 일갈에서부터 헷갈린 해석으로 음모에 휩싸이게 됩니다. 오로지 '내가 곧 부처'라는 말 놀음에 빠져 단박(돈오)에 부처가 되는 것은 오직 한마음에 있다고 꼬드깁니다. 그리고는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등 네 가지 상을 버리라고 가르친다'라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이 네 가지 상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으면 금강경은 아마도 껍데기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상은 자아가 있다는 관념이며, 인상은 개아가 있다는 관념이며, 중생상은 중생이 있다는 관념이며, 수자상은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러한 관념을 벗어나기 위한 목표를 삼는 것이 선수행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상을 떨쳐버리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견강부회를 드러내고 있는 짓들입니다. 대략 2천 년 전쯤, 금강경을 편집했을 당시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고민해 본다면 그런 황당한 주장에는 아마도 고개가 갸우뚱해질 것입니다.

 부처님은 인간의 보편적 사고와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을 극복하고 중도연기를 설했습니다. 존재론적 관점을 벗어나려 했으며, 특히 자아(아트만)나 브라만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있던 기존의 사상을 깨트려버리고 무아설을 설파했습니다. 존재론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부처님의 인간관은 '현상으로서의 몸뚱이(오온)는 존재한다. 그러나 거기에 나의 자아나 보편적인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단지 불교는 업에 의한 비실체의 변화인 윤회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불변하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아설은 부처님 열반 후 오래지 않아 교단 내외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게 됩니다. 당시의 다른 종교들은 일관된 변화를 위해서는 변화를 초월하는 핵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금강경을 편집하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교단 내외로부터 부처님 가르침의 근간이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강한 시도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설과 유신설만큼은 철저하게 깨트리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며 『금강경』에서 이를 지칭하는 표현이 당시 인도사회의 전통적 유신론과 유아론적 설명인 아상, 인생상, 중생상, 수자상입니다.

 아상은 '아트만으로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영혼설'이고, 인생상은 '보특가라로 독자부에서 주장하는 영혼설'이며, 중생상은 '사트바로 특정 종교나 학파의 주장이라기보다는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유력한 영혼론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자상은 '지바라는 것으로 쟈이나교의 영혼설'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에서 이러한 4가지의 상을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의 완전한 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당시의 사상과 타종교가 부분적으로라도 실체를 주장하고 있던 그 견해를 비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선불교가 이를 번역하면서, 나라는 생각, 인간이라는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오래 산다는 생각으로 번역하고 검토 한번 없는 채, 잘못된 가르침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없어야 깨달음을 얻는다며 단박 깨침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찌 부처가 되는 중생의 길이 오직 한마음에 달려 있을까요? 과연 뛰어난 마조선사일지라도 한 찰나에 선뜻 부처님의 경계에 이를 수 있었을까요? 수만 갈래의 마음, 항하강의 모래 수만큼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종자를 하나로 모아 그 마음까지도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 부처님의 경계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처럼 우격다짐의 믿음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임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판단해서 말이 안 되면 바로 버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한국불교는 이런 엉터리 해석을 전수하며 견강부회에 빠져 있는 것같아 안타깝습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