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말은 굳이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는 대부분 '공(空)이 물질이고 물질이 곧 공이다'라고 알고 있고 또 대부분의 스님들도 그렇게 알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처럼 진실이 엄청나게 왜곡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키워드를 공(空)이라고 잘못 설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키워드는 분명히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입니다. '색즉시공'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반야심경의 키워드를 통해 가르치고자 했던 핵심은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알아서 일체의 고액(苦厄)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반야심경의 문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공이란 일체 고액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온이 공함을 알아야 된다고 할 때 오온이라는 것의 오직 한 부분인 그 공인 것입니다. 여기서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말하는 것으로써 '나'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 오온이 각자의 주인이고자 하는 '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란 오온의 연합체인 것입니다. 그 오온 가운데 하나가 '색(色)'입니다. 그리고 '수(受)' 느낌작용, 즉 좋다거나 싫다 또는 그저 그렇다를 구분하는 감수작용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개념들을 엮어서 생각하는 표상작용인 '상(想)'이 있습니다.

 그다음엔 어떤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려고 하는 형성작용, 즉 의지작용인 '행(行)'이 있습니다. 그때 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의 틀, 마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식을 말하는 '식(識)'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모두 공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모든 고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키워드요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본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을 대표하여 줄인 말입니다.

 이 문맥의 뜻은 먼저 우리가 몸이라는 물질적인 구속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몸의 고정된 실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전에 아팠지만, 치료해서 다시 건강해졌다고 한다면 과연 아팠던 몸은 어디로 갔을까요? 내 몸이 본래 아픈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건강한 상태로 돌아오는 순간 아팠던 몸은 사라진 것이며,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에 아팠던 몸이 건강한 몸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몸의 한계나 기능들을 '불변의 무엇'이라고 규정한다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 몸은 변화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느낌작용(受)'도 마찬가지입니다. 좋다·싫다는 어떤 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달라집니다. 그지없이 이쁜 꽃도 기분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 합니다. 조건에 따라 이쁜 꽃이 보기 싫은 꽃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 실체입니다. 이쁜 꽃이 없어지고 보기 싫은 꽃이 드러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공을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꽃 자체가 없어진 것으로 됩니다. 생각작용인 '상(想)'도 그렇습니다. 의지작용인 '행(行)'도 그렇습니다.

 생각작용도 의지작용도 모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닌 조건을 따라서 바뀌는 공성(空性)인 것입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던 생각작용과 의지작용들이 그 조건들이 사라지면서 다른 것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이 또한 '실체가 있다'라고 집착하게 되먼 괴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온의 하나하나를 전부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규정해 버린다면 바로 '고(苦)'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단지 오온은 변하고 있는 여러 인연 조합, 인연다발의 한 측면일 뿐입니다. 그래서 한 측면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공(空)입니다. 존재론적으로 '비었다'거나 '없다'가 아닙니다. 비었거나 없는 것은 실체가 아닌 것을 내가 무엇이라 규정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인연 조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없는 것을 있다고 나만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러한 잘못된 판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반야심경에 말하는 색즉시공은 '고(苦)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편'입니다. '물질이 있고 없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온의 하나로서 색이며 여기에 '어떤 변수를 주느냐'에 따라서 내가 괴로울 수도 있고 괴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색즉시공의 정확한 뜻입니다. 아픈 몸도 조건을 달리하면 건강한 몸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공즉시색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들의 조합입니다. 인연의 다발들은 끝없이 변합니다. 거기에 내가 무슨 변수를 넣어주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의 모든 것은 '현재의 나의 고(苦)를 연기적으로 잘 분석하면 바로 즐거움과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며, '괴로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으로써 그 가르침의 의미가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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