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
남명학 박사

 남명의 제자 진극인(陳克仁·?~1551)은 생원 어응신(魚應辰,1510~1572)의 사위로 원래 함양에서 출생했으나 김해로 장가 와서 사위가 되어 김해에 정착하였다. 응신의 아버지는 집의(執義)를 지낸 어영준(魚泳濬·1483~1529)이다. 응신은 남명이 산해정에 있을 때 교유하면서 김해지역 문풍에 이바지 한 인물로 알려진다. 진극인은 재종형 진극경과 합천서 남명을 처음 뵈옵고 그 이후 산해정에 출입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응신은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시에 합격한 후 과업을 포기하고 자적하며 여생을 보냈다.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할아버지는 어효선(魚孝善)이고 아버지는 사직 어한륜(魚漢倫)이며 어머니는 서령(署令) 김자진(金自珍)의 딸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자(字)는 언심(彦深)이며 호는 송정(松亭)이다.
 누대로 명문가의 후손으로 연산군10년(1504)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후 제용감 직장(直長)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 박사가 되었다. 중종3년(1508) 부수찬으로 있다가 병든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서 외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였다.
 중종6년(1511) 군위현감으로 가서 어진 정치를 베풀자 토호들이 "병 때문에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금을 무겁게 받아들이므로 민원(民怨)을 샀다"고 모함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1513년 정언을 지내고 이듬해 수찬에 제수되었으며 영산, 삼가 등지의 수령에 제수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가 직장·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울산군수가 되어 최고의 치적을 올렸다. 중종13년(1518) 헌납이 되어 이듬해까지 근무하였고 1522년 헌납으로 있으면서 병마절도사가 수군을 겸하여 다스리는 폐단에 대해 상소하였으며 그해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523년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나갔다 돌아와 장령?의정부 검상에 임명되었으며 중종24년(1529) 사인(舍人)을 지낸 후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강직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벼슬보다는 홀어머니의 봉양에 정성을 기울였다.
 남명은 어영준 부인 백씨(白氏)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1552년) 글속에 "내가 대부에게 절을 하고 당하에서 부인을 배알 한 적이 있었는데, 풍겨오는 덕의 향기가 난초 같았다. 훌륭한 인품은 남의 도움을 필요치 않았으니 대부공의 배필이 된 것이고 (중국 절강성에있는) 여수(麗水)에서 옥이 나듯이 훌륭한 아들을 낳았다"고 극찬하였다.
 생원(응신)이 사귄 사람이 모두 문학의 대가들인데, 이들에게 묘표를 써 달라고 하지 않고 나에게 청하는 것은 나무꾼이 난초를 본 것처럼 내가 집안일을 잘 알기 때문이다고 하여 생원 집안과는 무척 돈독한 사이인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진극인이 김해로 장가 와서 정착하게 된 연유도 남명이 중간에서 그 역할을 한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 그렇게 아끼던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뜨자 남명은 슬픔을 가누며 시 한수를 지었다.

 만진극인(輓陳克仁)
 
 천령은 수로왕의 땅에서 아득하여   (천령미미수로허)  天嶺迷迷首露墟
 
 태어날 때는 신어산을 알지 못했더라  (불증생식유신어)  不曾生識有神魚
 
 푸른 하늘에 뜬 구름 얽매임 없으니    (부운무계창창면)  浮雲無繫蒼蒼面
 
 그대 지금이 도리어 못하다고 누가 말했는가   (수도군금환불여)  誰道君今還不如
 
 비문과 만시는 간결하면서도 많은 뜻을 담고있는 명문장으로 꼽힌다.

 여기서 천령은 함양의 옛 지명이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