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대승경전인 '열반경(涅槃經)'에는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불성을 지닌 존재, 즉 영성적(靈性的)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성사상은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번뇌는 객진(客塵)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이 불성 속에는 아직은 감추어져 있지만 좋은 인연과 실천수행을 통해서 자기를 완성하고 남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훌륭한 공덕이 있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의 씨앗을 잘 틔우게 한다면 윤회에 얽매인 부자유의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깨달은 중생의 길을 택할 수 있고, 그들 스스로가 깨달음의 세계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고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보다 넓게 중생을 섭수(攝受)하여 그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부처님의 자비로 충만 된 가르침입니다. 불성사상은 바로 이러한 부처의 지혜와 자비를 일깨워주고, 그리고 중생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불성사상은 자아실현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매슬로우가 주장한 것처럼 안전과 의식주가 풍족해지면 정신적인 안정과 명예를 원하고 이것이 충족되면 자아실현의 욕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불성을 왜곡시켜 육체와 다른 신적 유물이라 설정해 놓고, 그 영혼이 육체와 분리될 때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 중 어느 한 곳으로 가야 한다며 불성을 지닌 영성적 존재를 겁박하는 신앙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에게 의지할 것을 강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의존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에는 인간 태생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오랜 기간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출생 후 곧바로 걷고 또한 길지 않은 기간 내에 자립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걸을 수 있기까지 거의 1년이 소요됩니다. 그 밖에 정신적·신체적인 자립까지는 대략 20년 이상이 걸립니다.

 이처럼 기나긴 세월 동안을 의존적 상태로 지내다가 보니까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인 나약함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존 대상인 인격적인 신의 존재가 설정이 되었고, 그 인격적인 신의 가치관, 감정, 행동 유형을 만들어 낸 뒤 그리고 그것들을 운명적이고 격정적으로 받아들여 체화하려 합니다. 그 무엇의 종이 되려는 예속성, 즉 종의 습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신을 찾고 절대자를 부르짖으며 만사를 '신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과 생각을 가진 신이 어디에서나 인간의 행동을 낱낱이 감시하고 신의 뜻대로 인간을 조종하고 있노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흙으로 빚은 한갓 흙덩이로 전락 당하고, 신의 영광을 위하여 쓰이는 하나의 도구로 스스로 타락시킵니다. 결국 인간은 제 스스로 주인이 되지 못하며 항상 무엇인가에 의지하려는 습성을 지닌 존재로 고착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만이 천국으로 안내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속삭임에 정신줄을 놓아 버립니다. 이러한 구도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속성은 동기부여를 위해 당근과 채찍을 이용합니다. 경제적 보상이나 비경제적 보상, 즉 칭찬이나 두둑한 연봉, 승진 등을 이용하거나 정신적·신체적·경제적 처벌을 통해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질이나 명예와 같은 보상은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그에 따른 약발은 더이상 의미가 없으며, 그 열정도 급격하게 식어버립니다. 또한 처벌도 반복이 되면 면역력이 생기거나 오히려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은 불성을 지닌 영성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초기경전인 잡아함경의 우다나경에는 부처님이 무지에 빠져 노예적 속성을 지닌 중생을 초대해 놓고 다음과 같이 설법을 했습니다. "어서 오라, 벗이여! 무엇에든 예속되는 것이 고통이니라.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참 즐거움을 누리느니라." 여기서 부처님이 '벗이여'라고 부름은 부처님과 중생을 하나의 당당한 주인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가 부처님과 더불어 평등한 관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등한 입장에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불성을 존중하고 꽃피울 때 무한히 긍정적이고 자발적인 에너지가 솟아나고 열정적인 행위가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지위와 명예를 누리기 위해 삶의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삶은 즐거워야 합니다. 보상과 처벌에 기대면 삶의 즐거움은 달아납니다. 즐거움이 있는 삶은 자아실현이 구현된 삶입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는 보상과 처벌이 아닌 자아실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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