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김해남명정신문화연구원장/남명학박사

 누구에게나 청년 시절에는 인생 진로 선택으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남명도 여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과거로 출세하려는 마음 있어서 여러 차례 시험을 보았다.

 거기에는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집안을 지탱할 가장으로서 아들 노릇을 감당해야 하기를 바라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지마라고 하였다.

  출사를 아예 포기하기보다는 다소간에 그럴 의향을 접었으나  20세에 별시 초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과 회시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과거 시험이 대장부가 세상에 드러내는 방법이 못되는데, 하물며 소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동당시(東堂試)에만 응시하여 세 차례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런데 남명에게 인생 일대 전환기가 왔으니, 25세 때인1525(중종 20년) 산사에서 벗들과 송나라 때 42명의 학자가 명나라 성조의 명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으면서 노재(魯齋) 허형(許衡)이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연의 학문을 배움으로 삼아서, 나아가면 정사를 행함이 있고 물러나면 마음을 지키는 바가 없으면 뜻하고 배울 바로 삼은 것으로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말에 크게 감명 받았다.

  이로부터 동양의 모든 유학과 성리학을 탐독하고 선현들의 사상과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윤은 중국 고대 하(夏)나라의 폭군인 걸(桀)왕의 정사에 간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하나라를 버리고 은나라의 수도였던 박(毫)으로 도망가서 마침내 탕(湯)왕을 섬겨은나라 창업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史記』에 이윤의 사람 됨을 “이윤은 자기의 재능을 숨기고 산야에 묻혀 사는 처사이었는데 탕은 그가 현명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이윤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탕은 다섯 차례나 사람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청한 후에야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다”고 한다. 

 원의 학자 허노재도 이런 이윤의 뜻을 소개했으리라 본다. 성리대전에 이런 대목을 접한 남명 또한 이윤과 같은 정신세계가 한나라를 창업하는 주역이라고 보고 자신의 뜻이 이윤으로 인해 상당한 영향를 받은 것으로 본다. 그리고 공자의수제자 안연의 학문과 뜻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중단하지 않은 모습을 흠모했으리라고 본다.


 이런 여러 계기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지만 한양에서 이웃 친구인 성수침(成守琛,1493~1564)의 영향도 작용하였다. 그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부친이다. 성혼의 종제 성운 형제를 통해 교유하였다. 

 율곡은 『石潭日記』에, “남명이 과거 공부를 하다가 하루는 백악산 아래 청송당(성혼)을 찾아가 그가 세상사와 인연을 끊고 청고한 경지에서 소요하는 것을 보고 참된 공부와 인생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 두게 되었다“ 고 하였다. 성혼은 기묘사화로 친구 조광조가 화를 입은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접었다.

 26세에 부친이 한양 집에서 세상을 떠나자 합천 삼가 선영에 모시고 여막을 짓고 살았다. 부친 은 제주목사의 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부임을 할 수 없게 되자 권신들의 시기로 ‘험지에 가지 않으려 핑계를 댄다’는 협의를 씌우자 남명이 중종에게 상소하여 판관이하의 벼슬은 회복할 수 있었다 한동안 삼가에서 생활하다가 29세에 의령 자굴산에 올라가 명경대에를 여러번 왕래하면서 지냈다. 인자요수(仁者樂水)라고 했듯이 뛰어난 경관을 글로 남겼다,

 높은 누대 누가 허공에 솟게 하였나
 당시 하늘의 기둥이 골짜기에 꺽어진 것이라네
 푸른 하늘이 내려 앉지 않도록 하고서
 해뜨는 양곡을 다 볼 수 있게 하였네
 입구에는 속인이 이르는 것을 싫어해서 구름으로 빗장 걸고
 바위에는 마귀의 시기를 겁내어 나무로 애워쌌네
 상제에게 부탁하여 주인으로 삼아 달라 하지만
 인간 세상 큰 은총을 시기하니 어찌하랴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