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부처님이 깨달음을 추구한 참 뜻은 '이 뭣꼬'와 같은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는 영원하거나 변치 않는 존재가 아니라, 인과 연으로 생기하여 이루어진 실체로, 우리에게 영원하지 않으며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라는 실체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인연으로 인해 생기한 그 실체는 '공(空)한 것이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 즉 만법이 공임을 깨달은 부처님은 '어떻게'라는 물음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삶의 태도가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가 대부분의 중생들이 추구하고 있는 삶의 태도로서, '무엇이라는 존재'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패턴입니다.

 중생들은 평생동안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거나, 원하는 '존재'를 갖고 싶어 안달복달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무엇'을 추구합니다. '그 무엇'은 허상인 실체를 의미합니다. 실체를 추구하는 삶 속에는 항상 타인은 적이나 경쟁의 상대로만 인식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실체는 제한적이고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얻기 위해서는 서로 경쟁을 해야 하고, 실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체에 대한 욕망은 적대감을 가진 경쟁을 불러 일으키고, 그러다가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면 타인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을 해하더라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집니다. 탐내고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 속에는 이러한 탐진치 삼독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실체를 추구함에 매몰된 중생의 삶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모든 실체는 우리의 삶과 관련해서 우리들이 인식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한다면 괴로움 뿐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 앞에 놓인 실체란 연기에 의해 나타난 허상이므로 이를 어떻게 다루며 살아갈 것인가는 중요한 삶의 다른 한 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엇이라는 실체를 추구하고 살아가는 패턴을 욕망 속에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라 판단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다른 형태의 삶을 탐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력(願力)으로 살아가는 '깨달은 붓다의 삶'인 것입니다.
 
 원(願)은 '탐욕으로부터 해탈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무엇' 즉 실체에 빠진 탐욕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력(願力)이란 모든 존재는 연기로 인하여 생겨나기에 무상하며,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를 추구하는 탐욕을 추구하는 삶, 곧 중생의 삶은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참된 삶을 살아가려는 의지입니다.
 
 '법화경' 약초유품에 원력에 관한 4가지 서원이 나오는데 첫째, 해탈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결정코 그를 해탈케 하겠노라. 둘째, 부처님의 바른 정법이나 정견을 모르는 사람에게 바른 정법인 열반의 묘심을 기필코 알게 하겠노라. 셋째,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고 행복하지 못한 이가 있으면 결정코 행복하게 하겠노라. 넷째, 열반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열반에 이르도록 하겠노라 등 4가지 서원이 등장 합니다. '보현행원품'이나 '여래십대발원문' 등 많은 경전에도 원력의 행원이 나오는데, 이 모든 경전의 말씀을 실천 구도법으로 끌어들여 원력 실천의 행원으로 삼은 것이 바로 사홍서원입니다. 사홍서원은 중생의 수가 한없이 많지만, 모두를 교화하여 생사해탈의 열반(涅槃)에 이르게 하겠다는 '중생무변서원도', 다함이 없는 번뇌를 반드시 끊어서 생사를 벗어나겠다는 '번뇌무진서원단', 한량없는 법문을 남김없이 배워 마치겠다는 '법문무량서원학', 위 없는 최상의 불도를 마침내 이루겠다는 '불도무상서원성' 등 부처님을 향한 네가지 맹세입니다.

 이러한 맹세를 실천하는 삶은 현재에 안주하는 삶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은 남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연기하고 있는 법신으로서의 자격을 갖습니다. 법신이 일으키는 번뇌는 자기 개인의 번뇌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해결하여야 할 모든 사회적 문제가 법신이 끊어 없애야 할 번뇌입니다. 그래서 법문(法問)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며, 불도(佛道)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성취해야 할 깨달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항상 사홍서원을 기도의 마지막에 부쳐, 허망한 세간에서 공한 실체를 갈구하느라 자신의 참모습을 잃고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자신의 참모습에 돌아가 '어떻게'라는 화두를 두고 생사의 고해에서 해탈하여, 한없는 원력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종교입니다.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