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자 김해시의원

하성자 김해시의원

  숨쉬기는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들숨과 날숨, 즉 숨을 들이켜 숨을 내뱉는 행위이다.
 
 세상살이에도 숨쉬기가 필요하다. 사람과 어울려 만드는 사회관계망이나 기능과 기술이 제공하는 첨단 생활 관계망에도 일단 멈춤, 건강한 숨쉬기가 필요하다. 

 소통은 나-너 사이에 존재한다고 하며 대화에서 일방향인 '나-'는 소통이 아니라고 했다. 말 하는 '나'와 들을 줄 아는 '너', 간격과 공감 정도에 따라 대화의 밀도와 관계성이 좌우되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막 쏟아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때 누가 자기 말을 잘 들어 주었던가를, 생활에 쫓겨 말을 기울여 듣거나 반응을 살필 여유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다행한 일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서로의 감정을 눈빛으로 주고받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말이 없어도 느낌으로 알게 되는 사랑, 최고 소통은 그런 교감이 아닐까 한다. 부모 자녀 사이, 선생님과 학생 사이, 직업상 만난 사람들끼리 그런 소통, 그런 숨쉬기가 있다면 따뜻한 공감 사회는 바로 우리, 지금, 여기가 될 수 있다.

 신문을 보시며 '응' 하는 아버지, 드라마에 집중한 채 '그래'하는 엄마, 컴퓨터나 휴대폰에 눈을 꽂은 채 '왜요?' 하는 자녀, 이런 가정의 모습이 개그 소재만은 아닌 것이다. 심각한 고민을 대충 흘려듣고는 '알아요, 걱정 마세요.'라고 위로하는 그야말로 감정 삭제된 '좋아요'에 위로받지 못하는 관계들로 형성된 사회의 모습이 두렵다. '난 괜찮아' 라는 지나친 자기긍정이 자기의무감이 돼 억압받는 사이, 스스로 왜곡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묻혀가는 생활이 두렵다. 

 시골 출신에다 시댁, 친정에서 맏이인 나는 주변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하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무관심이 주는 편안함도 있으니 모른 체 하고 방해하지 말라는 큰 딸의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간섭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좋은 관심도 간섭이 되는 사회 분위기니만치 관심은 늘 조심스러워야 한다. 건조한 계절에 산불이 잦듯 무미건조한 사회에 그들이 형성한 대중 심리의 부정적 불씨가 우려된다.

 "어떤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를 기습하는 것, 우리를 맞히는 것, 우리를 덮치는 것,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을 말한다." <하이데커>
 
 경험은 이처럼 강렬할 때 인식 속에 '경험'으로 자리 잡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 즉 누구, 혹은 무엇과 대립할 준비가 돼 있는가?
 
 공동체의 날숨은 파괴력을 가진다. 우리는 집단 속에서, 관계의 무감각한 긍정 속에서, 감히 자기 생각을 집어넣지 못한다. 집단거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기만일지도 모를 자기만의 의견은 깊숙이 둔 채 공동체의 날숨에 동승한다. 그런 공동체에 대해 나는 외로이 대립할 준비가 돼 있는가?

 심지어는 컴퓨터, 휴대폰, 각종 기기들은 내 상태를 무시하고 자기 입장에서 날숨 내뱉기만 한다. 여기도, 저기도, 그야말로 날숨이 판치는 세상이다.

 들숨이 그립다. 엄마의 잔소리가 그립고 친구의 진정어린 충고가 그립고, 아버지의 엄한 눈빛이 그립고 구성원의 풀죽은 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공동체가 그립다. 저마다의 날숨이 판치고 공동체의 날숨이 판치고 '나-' 일방의 날숨이 헥헥거린다. 들숨이 필요한 세상이다. 누가 말했다. "공동체는 경청하는 집단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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