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칠산 묘법연화사 법지 합장

  얼마 전 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한 여사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통화의 내용은 매일 아침마다 카톡으로 보내주는 좋은 가르침에 공감하며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상담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 그 지역에 들를 일이 있어 만나 상담을 하는 도중에 식당의 운영에 너무 자신을 혹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해서 이제 돈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장님의 답변이 매우 황당하였습니다. 그분 자신은 절대 돈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며 강변하는 모습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잠시도 식당의 자리를 비우지 못할 만큼의 집착임에도 돈에는 전혀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못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또한 자신 삶의 주인이 마치 자식과 식당이라는 착각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미시시피 강의 수로원 일을 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작품으로 썼습니다. 그 내용은 '같은 동네의 큰 부자가 호화유람선을 만들었는데 특히 뱃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배가 강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마다 뱃고동을 울렸고, 먼 동네의 사람들까지도 몰려 와서 구경을 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존재감이 과시되자 신이 나서 선장에게 뱃고동을 더 크게 울리라고 했습니다. 선장은 최고음으로 뱃고동을 울렸습니다. 그러자 배가 멈춰 섰습니다. 뱃고동으로 인해 배의 모든 에너지가 몽땅 소모되었던 것입니다.’라는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뱃고동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의 운항은 뱃고동 소리가 아니라 항구까지 도달하는 것이 목적임에도 본질을 망각해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의 본질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난 식당의 여사장처럼 돈이나 일에 노예가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존 애킨슨이라는 사람은 '당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주인이 된다'라는 금과옥조와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에서도 흔히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셨다'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그러나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보면 '예수님'은 나와 따로 존재하는 절대자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라는 '절대자가 내 삶의 주인이 되셨다'라고 한다면 너무나 맥이 빠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구절을 되새겨 보면 예수님은 우리 각각의 마음속에 지어지는 성전이 진정한 교회라고 한 것이라 해석이 됩니다. 따라서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안에 주인이 거처할 집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거처할 집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시각은 이와는 다릅니다. 부처님은 출가하신 뒤 수행의 초기에는 자신의 육체를 만든 이가 누구인지를 몰라 방황을 했습니다. 부처님이 생존하신 이전과 당시에도 창조자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비로소 자신을 보니 자기 육체를 만든 이는 다름이 아닌 자신 속의 갈애, 즉 집착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나에게는 이제 교만, 불안, 편견, 의심, 나태, 혐오, 망상, 수치심 등을 지탱하는 근원인 무명이 깨어지자 번뇌와 집착을 담고 있던 집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과거 그 무엇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라고 부르짖으며 "방랑하고 방랑하며 내 집 지은 자를 찾고 있었으나 찾을 수 없었는데 알고 보니 내 집을 지은 것이 바로 갈애였네. 갈애여! 이제 그만 그 집을 짓게나. 그대 서까래는 번뇌, 그대 머릿돌은 무명이라네. 그 머릿돌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네. 이제 갈애는 끝이 났고, 나는 열반을 얻었다네"라고 찬탄했습니다.

 주인이 거처할 집을 마음속에 만들라는 기독교식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는 이야기입니다. 갈애와 집착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또 집을 지었나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므로 자신이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무명을 밝혀 갈애와 집착을 깨면 내가 바로 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 말에 감동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도 '자기 자신이 되라'고 젊은이들에게 고합니다.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물어보아 진짜 나의 참된 삶을 주인으로서 살아가라는 충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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