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규 논설위원

 

한상규 논설위원

 옛날 산사에서 한 스승 밑에서 학업을 닦던 두 청년이 잠시 휴가를 받아서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길을 한참 가다가 그중 한사람이 길이 움푹 페인 코끼리의 자국을 보고 새끼를 밴 어미 코끼리의 발자국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를 본 다른 청년이 '자네는 무엇을 보고 새끼를 밴 코끼리라고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리하자 '자네 여길 보게나 오른쪽 발자국이 더 크게 페여 있지 않은가 이걸 봐서 코끼리는 새끼를 밴 게 틀림없어' 또 한참을 내려오다 갈대숲이 한쪽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눈먼 코끼리가 이렇게 했다고 말하였다. 그런 뒤 조금 내려 오다보니 큰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 코끼리를 보고는 의문이 풀렸다. 휴가를 마치고 두 청년은 다시 산사로 돌아왔다. 지난 일을 미처 몰랐던 청년이 스승에게 불만스런 어조로 '스승님께서는 저 친구에게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저한테는 왜 가르쳐 주지 않으신지요. 저는 섭섭합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자 스승은 지혜로운 제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느냐? 고 하자 '저는 스승님이 늘 말씀 하신 데로 가르침을 마음으로 깊이 알려고 했을 뿐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사실을 마음으로 깊이 깨닫는 공부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마음은 경(敬)에서 나와야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은 1568년 무진봉사(戊辰封事)라는 명종께 올리는 상소문에서 "마음은 이치[理]가 모이는 주체이고, 몸은 이 마음을 닦는 그릇이다. 그 이치를 궁구함은 장차 쓰려는 것이고 그 몸을 닦음은 장차 도를 행하려는 것이다. 그 이치를 궁구 하는 바탕이 되는 것은 글을 읽으면서 의리를 강명하고, 일을 처리 할 적에 그 옳고 그름을 찾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슴속에 본심을 간직하고 밖으로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가장 큰 공부는 곧 반드시 경(敬)을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럼 경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은 정제하고 엄숙하여 항상 마음을 깨우쳐서 어둡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한 마음이 주인이 되어 만사에 응하는 것은, 안은 곧게 밖은 방정하게 하는 것이다  경을 주로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을 간직할 수가 없고, 마음을 간직하지 못하면 천하이치를 궁구 할 수 없으며,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면 사물의 변화를 다스릴 수 없다. 더구나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사람을 쓰는 것은 몸으로써 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로써 하는 것이다. 사람을 눈으로만 뽑는다면 잠잘 때 이외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이 경(敬)하지 못하고 경(輕)하고 경(傾)하다 보니 경(競)하다. 눈으로만 세상을 보니 다투어 나아가고, 다투어 경쟁하고, 한 쪽으로만 치우쳐진 생각과 행동으로 가볍게 처신하다보니 근거 없는 말에 현혹되어 진실을 규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하니 사람 쓰기가 쉽지 않을 진데, 그러면 경공부부터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경공부는 유학에서 공자 때부터 내려온 불변의 진리인데 보통 사람이 어떻게 체득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것이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마음을 진정(眞定)하면 쉽다. 세속의 일이 아무리 고달프고 괴로워도 자신의 마음부터 다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음을 한곳에 정지하여 흩어지거나 움직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 경상우도의 대유학자이자 스승이신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은 의령 자굴60세 이후 지리산 중산리에 '산천재(山天齋)'라는 교육의 터를 잡고 홀로 하늘을 받드는 기상으로 많은 학인들과 학문을 논하는 것을 생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때는 보릿고개 오랜 가뭄 속에 끼니조차 연명하기 어려운 초 여름날 오전 강학을 마치고 점심때가 되었다. 보리밥에 된장국밖에 없다는 부인의 걱정에 남명은 "오늘 점심은 된장국에 나물을 듬뿍 넣고 아주 짜게 하시오"라고 이르고는 제자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명은 잠시 수저를 놓고 제자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모두가 눈치를 보며 꽁보리밥에 된장국을 먹다말고 수저를 놓고 있는데 성주서 온 김우옹과 의령서 온 곽재우 두 사람은 된장국에 밥을 말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남명은 느끼는 바가 있어서 두 사람을 불러 "너희들은 어찌하여 소태같이 짠 된장국을 그리도 맛있게 먹었느냐?"고 묻자 두 사람은 저희들은 스승님께서 마련해주신 음식이라 감사하며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이를 본 남명은 자신의 외동딸(김해 만호 상산김씨에 출가)에게 과년하지만 출가를 못한 딸 둘이 있어서 두 제자의 됨됨이를 보고 그들의 부친을 만나 외손녀의 혼사를 성사시켰다.
 
 훗날 두 사람은 학문과 인품이 내조 덕분에 더욱 두터워져서 김우옹은 대사성에 이르렀고, 곽재우는 초야에서 변란을 들은 뒤 전 재산을 내어 의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들이 일시에 모여 초계, 의령 등지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조정에서 주는 관직도 받지 않았다. 남명은 사람을 마음으로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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