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이어서>>>

연자루(燕子樓) - 맹석흠孟碩欽

先祖遺墟認幾春 선조유허인기춘
寶欄朱閣闃芳塵 보란주각격방진
百年往事憑誰問 백년왕사빙수문
園素蒼茫似語人 원소창망사어인

선조 남기신 터에 몇 년 만에 찾았네
보란 주각이 더없이 아름답고 고요한데.
지나간 백년의 일 누구에게 물을까
원구단본디대로 있어 아득한 옛일을 말하듯 하다.

작가 맹석흠은 좌의정(左議政) 맹사성의 증손으로 1429년에 태어났으나 죽은 해는 모른다. 세조(世祖)때의 무신이었다. 무 과에 급제한 뒤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세조 13년(1467) 5월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을 제압하고 이시애를 참수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봉해졌다. 11월에는 건주(建州) 를 정별한 공이 1등으로 꼽혀 3계급 승진했다. 가선대부에 올라
신창(新昌君)에 봉해졌으나 이듬해 관병(官兵)을 사사로이 부렸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여산에 중도부처(中途付處) 되었으나 곧 직첩을 돌려받았다. 1480년(성종11)에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였으나 그 뒤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증조부 맹사성이 김해를 찾아 연자루에서 시를 남겼음은 연자루의 경승을 다시 느끼게 한다.

연자루(燕子樓) - 맹세형孟世衡

遺篇高擖擬千春 유편고갈의천춘
大厦飜成一炬塵 대하번성일거진
推有玄禽知社日 유유현금지사일
歸來不見捲簾人 귀래불견권렴인

남기신 글귀 높이 길려 천년을 기약하더니
번듯하게 큰 집 불 한번에 티끌이 되었네.
오직 까마귀는 사일을 알고 있어
변함없이 돌아오는데 주렴 걷던 미인은 보이지 않네.

작가 맹세형(1588~1656)은 맹사성의 8세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623년 정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를 시 작으로 관직에 올랐다. 울산부사때 “백성을 사랑하는 데는 반드 시 먼저 절용해야 한다.”며 절약에 모범이었다. 벼슬을 하면서도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백성들에게는 양로의 잔치를 베풀어 민 속을 교화하였다. 봉상시정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 시는 작가의 시서(時序)에서 느낄 수 있지만 임진왜란 후에 김해에 와서 연자루에 걸려 있다전화에 불탄 선조(맹사성)의 시판을 손질한 후 김해부의 별관에 걸고 그 왼쪽에다 이 시를 걸 었던 것이다. 당시의 김해부사는 조 즙(趙 濈) 이었고 그의 아들 맹주서 역시 시서(詩序)에서 “정묘년(丁卯年, 1627)에 맹세형 이 말을 타고 김해부에 갔다”고 적고 있어 맹세형의 연자루는 1627년의 작품이다. 

 

연자루(燕子樓) - 맹주세孟貴世(世는 瑞다)

重建高機海上春 중간고루해상춘
烏衣豈解有兵塵 오의개해유병진
祖先當日題名處 조선당일제명치
恨未歸爲倚眺人 한미귀위의조인

높은 누각 다시 세운 바다위에 봄이 왔네
오이향이 어찌 풀어져 병란이 있었는가.
선조께서 그 옛날 시 지었던 곳에서
애석해 돌아가지 못하고 기대어 사람을 본다.

작가 맹주서는 광해군 14년(1622)에 맹세형의 아들로 태어났 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으나 선조 맹사성, 아버지 맹세형과 연자루 시를 통해 가야왕조와 김해의 아름다움을 높여준 시인이 요 정치가다. 165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검열을 시작으로 1673년 우승지, 병조참의를, 1678년 안동부사시 선정을 베풀어 가선대부여 오로고 특진관에 올랐다. 아버지 맹세형으로부터 선 조(맹사성)의 시판이 연자루가 불타버려서 김해부 별관에 걸어 두었으나 살펴보라는 말을 들었으나 바쁜 관직 수행으로 찾지 못히고 있었다. 변국한 김해부사가 연자루를 중창하였는데 건물 이 장대하고 아름다움이 으뜸이라는 소식에 김해부를 찾아 선조 와 아버지의 관을 가져오게 하여 이 시와 함께 연자루에 걸게 하였으니 이 사는 1677년의 작품으로 느껴본다. 안타깝게도 연 자루와 함께 에 자주 등장하듯 “티끌”이 되었음을 한탄할 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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