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김해 남명 선비정신 문화를 찾아서
경남정신의 뿌리

이어서>>> 
실학자들은 '법도 오래 가면 폐해가 생기고 시폐는 
반드시 고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보는 일종
의 변법사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토지제도 및 
국방책에서도 정전론(井田論)에서 출발한 균전론적인 
'한전론', '여전론과 병동(兵農) 일치적인 '부병제(府
兵制)'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송(宋)나라를 모방
한 조선조의 문치주의는 문약(文)을 초래하여 변방 
오랑캐의 외침에 속수무책인 점을 주목하여, 국가에
서 문무의 비중을 균등하게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남
명을 비롯한 남명학과 및 이익과 정약용이 일치하고 
있고 그 논조도 매우 유사하다. 그것은 남명이 박학
하여 병진(兵庫)에 까지 미치고 제자들에게 대책문
을 출제하며, 그 결과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로서 봉
기한 의병이 연전연승한 데에서도 증명이 되고있다
또한 선진(先秦)시대 사(士)와 벼슬살이로서 출사
(出仕)란 그 어원이 단순한 글을 하는 선비나 문관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끼를 지닌 무사(武士)나 
무관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남명의 학문사
상이 송명(宋明)의 성리학적인 것과 포괄하여 근원
적인 데로 거슬러 올라가 유학의 경세치용적 실학사
상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익은 그
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퇴계의 글은 본래
의 근원과 윤리와 행실에만 오로지 힘쓰고 정사(政
事)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당시에 법령이 해이해지
고 폐단이 많아서 변통이 있어야 할 기회였다. 이기
심성의 이론 다음에 시무(時務)의 큰 것을 대략 말
하여 5년이나 7년 후의 효과를 기대하여야 바야흐로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여 남명의 학문 경향성
과 좋은 대비를 한 논평이었다.
5. 국토 사랑 정신
1) 유기체적 국토인식
남명의 국토산하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과 결부되
어 있으니 필연적이라 하겠다. 그의 삶에 대한 특징
을 조사해 보면 이것은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남명
의 삶에 대한 특징으로 우리는 빈번한 거주지 이동과 
불우한 삶, 가정 안국으로 관련된 사화를 들 수 있
다. 이는 그의 정신과 행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다. 즉 처음의 것은 국토산하 곳곳을 살펴 민중의 삶
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두 번째의 것은 
관념적 유희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정신을 단검시키
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의 것은 모순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불출사(不出仕)의 의지를 강하게 
구축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국토산하에 대한 인
식이 그의 빈번한 거주지 이동과 밀착되어 있으니 여
기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남명은 합천 삼가에서 태
어났지만 아버지가 문과에 급체함에 따라 서울(5세
경)로 올라간다. 함경도 단천군수로 아버지가 외임을 
맡자 따라 갔다가 서울(18세)로 다시 돌아온다. 아
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 삼가(26세)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만 4년을 살다가 처향인 김해(30세)로 이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삼가(45세)의 선영에 장
사지내고 거기서 생활한다. 그리고 61세 되던 해에
는 지리산 아래 덕산으로 이사해서 세상을 마치게 된
다. 이처림 남명은 삼가 → 서울 → 단천 → 서울 → 
삼가 → 김해 → 삼가 → 덕산으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외향이나 처향으로 자주 
옮겨 다니게 된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뜻을 후세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지리산하의 덕산에 자리를 잡고 제자들과 강학에 몰
두한다. 다음 자료를 보자.
남의 집에 살다 보니 날마다 불편한 일이 생기어, 선
친께서 계시던 옛터로 돌아가 뜻을 같이 하는 향리의 
벗들과 함께 지내고 싶은 생각입니다...지금부터는 하
루의 일과가 나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다
만 몸을 의지할 계책이 없어 쉽게 뜻을 이루지 못할
까 염려스러울 따름입니다
위의 글은 김해에서 노흠(盧欽, 1527-1602)에게 보
낸 편지의 일부이다. 남명은 여기서 남의 집에 살기 
때문에 불편한 일이 많이 생겨 고향인 삼가로 옮겨가
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벗들과 함께 학문
을 강마하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몸을 의탁
할 곳 또한 마땅하지 않았으니 그것 또한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아 자신이 생각했던 진실된 공부를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였던 것이다. 남명은 이처럼 아버지의 
전근이나 경제적 이유로 하여 자주 거주지를 옮겨 다
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폭넓은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민중의 생활모습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
으며, 국토산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
다. 서울에서 지방까지, 혹은 내륙에서 해안까지 거
주지를 이동 하면서 남명은 그의 사유 속에 국토 사
랑과 함께 현실과 밀착된 사유를 키위왔던 것이다.
 
다음호계속>>>

김해일보  gimhae114@naver.com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해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