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철

산해정 인성문화진흥회장

김해대학교 겸임교수

21세기 최고의 화두는 복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복지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이건 국태민안을 통한 태평세월을 추구해 오지 않은 나라는 없을 정도로 내용과 명칭은 다르지만, 복지를 중시해 왔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국민의 안녕에 대한 욕구는 첨단 사회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미 복지 선진국이라고 하는 서방 대국에서도 복지에 대한 열망은 끝이 없다. 하지만 그 많은 선진형 도시에서도 어느 곳 하나 복지수도로 명명하지는 않았다. 경남 창원이 람사르 총회개최를 계기로 환경수도로 선포하였을 뿐, 어느 한 곳도 복지를 특성화시키고 또 브랜드화해서 명명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묻혀있던 아주 ‘오래된 미래’ 김해가 복지의 발상지로서 복지 도시의 모델로 특화시켜 나가는데 상당히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양성평등 도시이면서 다문화도시 그리고 주민 친화적인 도시라 할 수 있는 김해가 복지의 발상지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수로왕의 탄강설화와 허 황옥 황후의 행적에서 역사적 고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된 미래라고 하는 가야는 오랫동안 삼국시대에 묻혀 그 존재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오늘날 유일하게 가야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기이’ 편의 ‘다섯 가야’, ‘가락국기’ 그리고 ‘탑상’ 편의 ‘금관성 바사석탑’, ‘어산불영’ 조가 그렇다. ‘삼국사기’에는 다른 기록에 한 두 줄 살짝 끼워져 희미하게 가야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에 비해 ‘삼국유사’는 많은 기록을 품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많은 역사학자들이 ‘삼국유사’의 장점으로 꼽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구워서 먹으리.
 
 이 같은 장면에는 고대사회에서 왕을 맞이하는 전형적인 요소가 다 갖추어져 있다. 일종의 민간신앙적인 의식의 형태인데, 천명(天命)사상과 노동과 협업이 어우러진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다. 얼마 뒤에 공중을 쳐다보았더니, 보랏빛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드리워졌다. 그 줄의 끝에 자주색 보자기로 싼 금합이 나타났는데, 열어보니 해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수로왕은 열닷새가 지나자 키가 9척이나 되어, ‘처음 나타났다’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지었고, 그가 만든 나라를 가야국이라 불렀다. 나머지 다섯 알에서 태어난 이들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수로의 탄생설화는 알의 형상이라는 신령스러운 면은 박혁거세나 주몽과 같지만, 한꺼번에 여섯 개가 나타나고 그들이 여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는 아마도 일국 체제의 강력한 왕권이 아닌, 연합체의 성격을 띤 나라였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의 탄생설화는 신격화시키기 위해 아주 높은 곳, 신령스러운 곳, 즉 태백산이나 백두산 같은 높은 산을 탄생의 배경으로 삶는 반면,김해에서 가장 높은 신어산이나 무척산이 아니라 낮고도 낮은 구지봉이 공간적 배경이 되었다. 구지가를 부르며 지도자가 오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간절한 열망에 맞추어 낮고 낮은 구지봉 즉, 민중 속으로 나타나셨다. 이는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6개의 알은 독단적이 아닌 나눔을 통한 더 큰 골격을 이루겠다는 분권형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근래에 들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균형발전을 위한 분권형 혁신도시의 전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로왕

                육담

거북의 머리를 내노라고
춤추며 하늘에 기원하여
보랏빛 줄을 따라 하강한
소담스런 황금알 여섯 개

백두산도 태백산도 아닌
신령스럽지도 높지도 않은 
민초들이 거하는 구지봉
기마민족의 근거지로
철기문화 찬란히 꽃 피우며 
그럴듯하게 하강할 만도 하건만,
높고도 귀한 곳 제쳐두고
머리를 기다리는 민심에 끌려
낮은 데로 임하셨네.

 수로왕은 궁궐과 청사를 짓는데도 농번기를 피해 백성이 한가한 틈을 활용하였다고 전한다. 지금의 공공근로사업은 유급으로 노동의 자율성이 따르지만, 그 당시에는 부역이라는 미명하에 무급으로 의무노동을 했었다. 수로왕의 애민은 남달랐으며, 백성들을 ‘위하여’라기 보다는 백성들과 ‘함께’하기를 즐겼다. 청와대 비서동의 이름도 참여정부까지 사용하던 여민관(與民館)은 MB정부에서 위민관(爲民館)으로 바뀌었다가 현정부에서 다시  여민관(與民館)으로 바꾸었다. 위민관(爲民館)은 정부가 주체가 되고 국민은 객체의 의미가 있지만, 국민과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하는 곳이란 뜻의 여민고락(與民苦樂)에서 따온 여민관(與民館)은 수로왕의 정신이 내포된 이름이다. 
 필자가 한때 김해의 슬로건이였던 [Gimhae for you.]를 [Gimhae with you.]로 바꾸자고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해왔던 연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탄강 설화에서도 나타나듯이 낮고 낮은 데로 임하여 백성들과 함께하고 또 백성을 배려하고자 했던 수로왕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오늘날 실천복지의 기본이며 김해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수로왕은 허황후를 아끼는 마음에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따르게 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여성이 시집을 가면 본래의 성씨는 사라지고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그렇게 무시당하던 조선 후기에도 본래의 성씨를 지켜 내었다. 그로 인해 오늘날 양성평등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허황후를 최초의 여성인권운동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기 위한 노력이 허황후를 중심으로 역사의 흐름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여권신장의 역사적 원조라 할 수 있는 공간적 배경이 가야이다. 
 그리고 이미 수로왕은 다문화 가족으로서 대표성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날 김해가 다문화 도시의 면모를 갖춘 것도 그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 역사에 근거해서 가야를 참여복지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김해가 다문화 가정이 많은 것과 여성 친화 도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수평적인 사회의 기본적인 이념인 양성평등 정신이 그 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며, 중소기업이 전국 최고의 수치를 자랑하는 것은 가락국이 삼한은 물론 해외까지 철기문화를 꽃피우던 오래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묻혀있던 찬란한 문화가 이제 오래된 미래가 되어 복지발상지로서 문화와 상생하는 경제복지 도시로 부활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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