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심지어 각 고을을 갈라 놓고 문권(文券 토지권리를 양도하는 증권)을 만들어서 그 자손(子孫)들에게 전합니다. 각 지방에서 바치는 공물을 모두 방해하니 하나의 공물도 납부할 수가 없습니다.그러므로 공물을 가지고 가는 사람은 구족(九族)가업을 다 팔아서 가도 관사(官司)에는 바치지도 못하고 여러 사사로운 집에갖다 바치고 있으며, 원래 바치는 공물의 백배(百倍)가 안되면 받지조차 않으니 공물을 계속해서 바칠 수가 없읍니다.그러니 도망하는 사람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어찌 역대 조종(祖宗)의 고을에서 민중이 바치는 공물을갑자기 날다람쥐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나눠먹는 바가 되었습니까? 이 어찌 임금은 나라를 독차지하는 부(富)를 누리면서도 이 종(僕돼서리)들의 방납(防納) 물건에서 자금을 구하려 합니까?" 라고 상소하였다.
중국이나 한국의 각 왕조가 멸망하는 것은 말기에 가면서 왕실과 귀족의 부패타락과 사치향략 그리고 혹은 전쟁으로 인하여 재정이 파탄되고 이를 조달
하기 위해 세금을 과다하게 민중에게서 착취하자 민심(民意)이 이탈되고 민중이 봉기하는 것이 직접 원인이다. 프랑스 혁명도 러시아 혁명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남명의 경세사상(經世思想)에서 공물 폐해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는 것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공리(公利) 사상에 바탕을 두었기에 더욱 절실한 것이었고 후세 실학자들의 시의구폐(時宜求弊)적인 경세사상, 즉 실학사상과 그대로 연결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남명의 '서리망국론'은 당시 국가의 실질적인 폐해를 적시한 것이다.
‘서리’라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전' 또는 '구실아치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 양한(兩漢)시대에는 기관의 장 만을 '관(官)이라 하고 관에 속한 자는 모두 '이(吏)'라 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관과 이가 별로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원(元)나라 이후에 관과 이가 점차 구분되기 시작하여 명과 청시대에 와서는 확연히 구분되어 출신을 제한하게 되자, '이'는 실무를 전담하면서 악폐를 저질렀다.
조선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서리가 사대부 계층과 신분적으로도 확연히 구분 되어 버렸고, 고려의 전시과(田柴科)에서는 잡리(雜吏)도 전시(田朱)의 지급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과전법(科田法)에서는 이들이 제외되어 버렸다. 서리들의 탐학이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제도가 생겨난 셈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들이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특히 공물(貢物)문제에 있어 제도적 모순,앞서 살펴본 대납(代納)과 방납의 작폐가 가능하게 된다.
이에 서리는 중앙, 지방할 것 없이 관료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수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공물을 낼 수가 없어 민중들은 유민화하고 도적이 되고 반란
을 일으키기까지 하여, 16세기에는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불안이 절정에 이른다.
남명은 선조가 즉위하여 벼슬로 부르자, 이 때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다.
옛날부터 권신(權臣)이나 척리(成里), 그리고 부시(婦寺:王后이하 왕 주위의 여자들과 宦官)가 나라를 전횡한 것은 혹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서리가 나라를 전횡한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치권력이 대부(大夫)에게 있는 것도 옳지 못한데 하물며 서리의 손에서입니까?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조종(祖宗) 200년의 유업(遺業)을 기록하면서도, 많은 공경대부(公卿大夫)가 앞뒤 서로 모두 정치를 서리에게 맡길 수가 있습니까? 이런 일은 차마 소 귀에도 들려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망탁(卓;中國 前漢末의 王孝과 後漢末의 董卓을 말함)의 간교함에도 이런 일은 없었으며 망한 나라의 세상에도 이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남명은 조선중기 나라의 정치가 바로 이 조세정책의 잘못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그는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공물의 방납과 이를 관장하는 서리의 작폐 때문이라 하고 있다.
맹자도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하였고 공자 또한 '먼저 민중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 가르쳐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나라의 기틀인 민중이 공물과 서리의 가렴주구에 생존마저 위태로워 살아나려고 유민화하고 도적이 되어 도덕을 버릴 수 밖에 없는 마당에, 임금의 구언에 이기심성과 윤
리도덕, 그리고 이단 배척으로 답한다는 것은 오히려 공맹(孔孟)의 정치사상을 버리고 자신들의 이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남명은 이어서 "서리들이 도적이 되어 모든 관청에 무리를 이루어 들어가 웅거하여 요직을 차지하고서 나라의 국맥(脈)을 결단 낼 뿐만 아니라 천지신명에게 제사 지내는 희생까지 도적질하여도 법관이 감히 묻지를 못하고 사구(司憲형조)도 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혹 일개 사원(司員하급의 젊은 관리)을 조금 규찰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견책과 파면이 그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고 관리들의 무리들은 손을 묶어 놓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근근히 녹봉이나 받아 먹으면서 아첨하며 따르는 지경이니 이것이 어찌 믿는 바가 없고서야 그렇게 되겠습니까?" 라고 하여, 그는 서리가 도적이 되어 무리를 이루어 나라를 결단 내고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단호하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들 서리들을 규찰하고 심문하여 죄를 논하고 예방해야 할 사헌부나 형조 등 조정의 대신들이 이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가렴주구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어서 세 굴을 들락거리는 교활한 토끼와 보호막으로서 딱딱한 껍질을 지닌 냇가의 조개로 대신들이 감싸고 도는 당시의 서리들을 비유하면서 도탄에 따지게 된 현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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