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수 김해도예협회 이사장

백파선(白婆仙) -1

불의 여신 정이로 알려진 (MBC 드라마) 백파선 사기장이 현시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주는 의미
 
김해(金海)는 고대로부터 역사적 유서가 깊은 지역으로 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그 중 자기생산과 관련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에, ‘김해도호부(金海都頀府)의 동쪽에 하품을 생산하던 감물야촌(甘勿也村)에 1개의 자기소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현재 감물야촌의 실체를 상동면(上同面) 일원에서 문화재 정밀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등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여기서, 상동(上同)이라는 명칭은 김해부의 동쪽에 있는 면이란 뜻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곳 상동일원(묵방리. 대감리)에서 조선 전기-후기에 해당하는 자기가마터가 확인되었다.
그동안 김해읍성·김해 구산동유적·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유적 등에서 ‘김해(金海)’라는 명문이 새겨진 분청사기인화문 발·접시 등이 다량 출토되었지만, 그 유물을 생산·제작한 가마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김해시 상동면 일대에서 진행된 몇 차례의 문화재조사를 통해 ‘김해(金海)’가 새겨진 분청사기유물과 한글이 새겨진 철화 백자편 등이 확인되어 김해도자기의 생산지를 밝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임진왜란(1592~98) 전후 김해지역에서 도자기생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김해에서 도자기를 제작하던 사기장 김태도(金泰道)와 아내였던 백파선(일본에서 지어진 이름)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다케오(武雄)의 영주였던 고토 이에노부(後藤家信)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 일본도 침략전쟁의 후유증으로 일본국내사정이 좋지 못하여 끌려간 조선인 사기장의 생활이 넉넉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23~4년 버티던 백파선의 남편 김태도(深海宗傳)는 1618년10월29일 61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로써 남편이 떠난 그곳에서 백파선은 자기들의 식구와 도자기를 생산하던 식구들을 보살피며 살다가 70세 나이에 960명의 식솔들을 데리고 도석(陶石)이 많이 나는 아리타(有田)로 이주하였다. 아리타에서 활발한 도자기생산 활동을 하다가 1656년 3월 10일 96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백파선이 죽은 후 증손자 후카우미 무네노리가 아리타의 호온지(報恩寺)에 만료묘태도파지비(萬了妙泰道波之碑)를 세우고 ”할머니는 고려(조선) 심해(深海) 사람 이었다 “라고 비문에 적었다. 
*백파선(白婆仙)-본명은 정확히 알려진 게 없으며 백파선이라는 이름은 훗날 온화한 얼굴에 사람들을 편하게 감싸주는 덕을 지녔고 백발이 성성하고 성스러운 느낌을 준다 하여 효심이 깊은 손자가 붙힌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심해(深海)-고향 김해를 마음깊이 생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설과 김해에서 깊은바다를 건너 왔다는 설이 있다.
                                              
백파선(白婆仙) -2
일본 전역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하여 수많은 조선백성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특히 후쿠오카지방의 다케오·카라츠·이마리·아리타지역과 큐슈 남쪽 끝 가고시마까지 수많은 조선의 사기장이 끌려갔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땅에 정착하기까지는 끊임없는 핍박과 고통을 당하며 인내라는 단어를 되새기며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도자기 작업을 위하여 조선 땅과 다른 토질(土質)을 가지고 있는 지형적 환경을 극복하고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실험과 생산을 통하여 좌절과 희망을 품고 살았던 조선사기장들의 흔적을 찾아 2002년부터 매년 일본 전역을 다녔다. 그 후 (사)김해도예협회에서도 매년 아리타 상공회의소. 아리타 백파선갤러리와 교류를 하며 연구를 하고 매년 열리는 김해분청도자기축제에서도 “김해 원류 사기장 김태도.백파선 추모제를 열고 있다. 조선시대는 유교이념이 뿌리내리며 기록의 나라 불리지만 사·농·공·상 제도가 뿌리 깊게 내려 공업과 상업을 멸시하던 풍토 속에 조선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실록과 양반가의 기록 등은 각 가문에 남아 유물로 전해졌다. 그러나 하층계급으로 내려가면 기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특히, 사기장의 생활상과 도자기 만드는 재료와 공정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조선사기장의 기록을 보려면 일본으로 끌려간, 초기의 조선사기장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기록한 묘비와 후손들의 이야기에서 생활상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가고시마 심수관요(沈壽官窯)에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방문객이 한국인이면, 선조의 나라에서 찾아왔다고 심수관요 갤러리 입장료를 무료로 하는 등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자손 대대로 내려오며 그리운 고향땅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며 한이 담긴 이야기를 자손들에게 물려준 결과 후손들의 머릿속 뇌리에 깊게 인식되었던 것 같다.
도자기의 고장 큐슈(九州) 사가현에 있는 이마리(伊萬里)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마을은 조선사기장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유출을 막기 위하여 통제가 쉬운 깊은 산골에 도자기마을 조성하였다. 외부인 출입 또한 철저히 차단하여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 매년 이곳을 갈 때면 이마리 입구에 위치한 도공들의 묘지를 보며 나라가 힘이 없어 이곳까지 끌려와 감옥 같은 깊은 산골에서 거칠고 힘든 여정을 견디며 살다간 조선사기장들의 영혼에 기도하였다. 일본의 도자기 산지인 사가현 카라츠(唐津)의 경우, 조선사기장들의 후손들이 도자기를 업(業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다. 카라츠에서 여러 요장을 다니다 우연히 아야요(窯)를 방문했다. 조선사기장의 후손이라고 밝히며 반갑게 맞이해주신 나가자토 노리모토(中里紀元). 나가자토 후미코(中里文子)부부를 만나 환담이 이어졌다. 그 이후에도 세차례의 방문을 통해 들은 나가자토 노리모토선생의 선조들이 일본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슬프고도 가슴이 저려왔다. 이 요장에서 각종 도자기에 그려 넣은 철새문양은 조선에서 건너와 다시는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계절 따라 왔다가 조선을 향해 날아가는 철새가 부러워 살아생전 고향땅에 가보고 싶은 소망을 그려 넣은 것 이라했다. 또한 선조들이 죽기 전에 유언으로 따뜻한 남쪽방향이 아닌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에 고향이 있는 북쪽방향으로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북쪽에 묘 자리를 쓰는 전통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살았던 선조사기장들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였고, 특히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직접 긴 시간을 내어 자기가문의 도자기 작업장과 멀리 떨어진 선생의 개인 도자기 작업장을 보여 주는 등 한국에 대한 각별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큐슈 오지마을 오이타현  히타시 온다도자기(小鹿田燒) 마을에서도 조선사기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18년의 세월동안 큐슈를 중심으로 조선사기장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동안 여러 번의 아리타 방문을 통하여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선조사기장인 이삼평과 김태도, 백파선의 기구한 운명을 알게 되면서 국력의 중요성을 알았다.
조선 최초 여성 사기장 백파선. 일본 아리타도자기의 어머니로 불리는 백파선을 일본 아리타에서 만날 때면 조선 땅에서 온 식솔들을 거두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어려운 삶을 개척해간 백파선! 백파선과 남편 김태도를 주제로 쓴 소설 인 무라다 키요코(村田喜代子)의 <백년가약(百年佳約)>(講談社, 2004) 내용의 한 문구가 생각난다. 
"한 달에 한번 산에 오르는 날이다. 일본에 건너온 고향 사람들이 모두 나와 근처의 고려 산에 올라 고국을 그리며 노래와 춤을 추고 저녁까지 실컷 노는 것이다. 꽃이 없는 꽃놀이지만 고향 동지들에게 꽃은 필요 없다. 고국과 이어지는 하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아이고 우리의 고향이여, 아이고 아름다운 산천초목이여, 아이고 훌륭한 우리들의 조상이여! 이 몸은 이국의 흙이 되리라. 아이고 당신을 그리는 마음은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어라."
비록 소설속의 이야기이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사기장들의 심정을 잘 표현한 글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며 고향을 그리워하며 일본 땅에서 살다갔다. 
임진왜란은 “도자기의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수십 년 전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 400년 전의 하이테크 도자기전쟁에서 조선은 세계에서 2위인 도자기기술의 중요성을 몰라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한 반면 일본은 조선에서 피랍 하여간 조선사기장들의 기술을 향상시키고 발전을 거듭한 끝에 명나라가 망하면서 생긴 간극을 이용하여 유럽에 도자기수출을 극대화 시키며 경제부흥을 맞이한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부흥은 임진왜란이후 300여년이 지난 뒤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며 경제규모가 명목기준 세계9위의 나라가 되었다.
물질적으로는 반도체와 휴대폰과 조선 산업 등 여러 가지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고 세계문화시장에 K-POP을 중심으로 한류를 전파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백파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이 땅에 가지고 있는 문명과 인적 물적 자원을 소중히 여기며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이 또다시 제2의 백파선을 만들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해본다.

참고자료

1.김해분청도자박물관 자료
2.한.일 백파선 국제학술포럼0608
3.무라다 키요코(백년가약)-講談社2004
4.김해 상동 자기 가마터-정밀지표조사
  2차학술자문위원회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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