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이어서>>>

 

김종간의 미친소리 스물 한 번째

 장유암

백마동래자기서
공문유화몽혼미
천매석주비범국
화상난야벽산루

황대주범모화항
극포조성청조계
고탑인귀유상재
금강기월영고저

백마가 동쪽으로 오고 자주색은 서쪽이라
불도 어린 화상의 꿈 혼미하여라.
공주의 돌배는 비단 돛으로 나라에 들어 왔고
화상의 절은 푸른산의 누각이다.
거친 대의 낮 염불은 꽃의 목을 본 뜬 것이요
포구 끝 물소리는 시냇물로 돋구어 듣는다.
옛 탑의 사람은 돌아가고 초상만 있으니
불경의 옥같은 그림자가 높고도 낮다.

장유암팔경

1. 춘일망해-봄에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
   1980년대 이후 이 경치는사라졌다.
2. 추포로화-가을 포구에 핀 갈대꽃.
   이 경치 역시 19800년대 이후 사라졌다.
3. 남포어화-밤에 횃불을 들고 남포에서 게를 잡는 모  습, 이 경치 역시 시만 남았다.
4. 탑등조일-장유암에 밝힌 연등의 모습.
5. 하야송풍 - 여름밤 소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6. 동척설궁-겨울철 눈 내린 풍경이 중국 제나라의
왕궁 같았다는 비유.
7. 금릉야경순-김해부의 밤 경치.
8. 구포귀법- 구포에서 고기잡던 배들이 돌아올 때의
모습.

김종간의 미친 소리 스물 두 번째

장유암을 찾아 동남쪽으로 푸른 산을 헤치고 옛 김해평야를 보며 "장유암 팔경"을 읊어본다. 황사 미세먼지라는 환경오염으로 그 옛날의 멋과 맛은 느낄 수 없지만 장유암 주변의 녹색 풍광과 솔바람은 길손을 연화세계로 착각하게 한다. 장유암은 언제 누가 창건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장유사가 옛 장유사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필자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옛 장유사에 대한 기록을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수로왕의 팔대손 김질왕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일을 숭상하여 세조모 허황후를 위해서 그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 29년인 임진년(서기 452)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합혼 한 곳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근처에 있는 평전10결을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이절이 생긴지 500년 후에 장유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가 도합 300결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은 왕후사가 장유사의 시지 동남쪽 구역 안에 있다 하여" 이 기록에서 장유사의 창건은 951년이고 그 위치도 지금의 장유사와는 맞지가 않다. 특히 많은 세월을 이어온 장유화상의 불교 도래와 최초의 수도처였던 불모산의 장유암과 혼돈해서는 안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권32에도 ““김해도호부에 장유산을 김해부 남쪽 40리에 있고 왕후사는 장유산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장유산은 지금의 장유3동 장유리의 뒷산인 태정산(금)으로 『김해음지」 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장유산으로 나온다.
2천여년 전의 역사는 그 모태와 힘을 어버이로부터 이어온 이야기다.
구전이요, 전설이 역사서의 밀알이다. 구전을 전설을 수
집하고 다듬어서 만들어진 것이 기록이요 역사서임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서양의 역사서와 세계사는 그렇게 만들어 졌다.

                                                
다음호계속>>>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