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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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간의 미친소리 스물 한 번째

은하사는 김해의 역사와 문화를 품은 고찰이다. 가락국 때 장유화상이 창건하였고 당시의 이름은 서림사 였다고 믿는다. 불교를 가지고 허황옥 공주를 수행해 와서 불교를 전파하며 서역의 모국 번성을 새로운 나라 가락국에서 기원하며 서림사를 세웠을 것이다. 서림사가 왜 은하사가 되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성 큰스님이 1970년대 주지로 부임하여 40여 년 동안 원력으로 전각 중창과 보수로 도량을 넓히며 가락불교의 큰 가람으로 발전하고 있으니 불향이 꺼지지 않기를 합장하며 새 주지 혜진스님께 취운루와 일주문 중창을 기원해 본다.

불모산 장유암

불모산은 이름에서 어머니의 포근함과 엄숙함, 먹먹함으로 부처님을 떠올리게 된다. 불모와 장유의 이름에서 예사롭지 않은 신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왕비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시집왔으며 공주가 시집 올 때 공주의 오빠 허보옥이 함께 왔다. 아유타국의 왕자 보옥은 머나먼 바닷길의 무사 항해를 위해 부처님의 공덕을 빌며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와서 수로왕의 처남이 되었다. 그러나 허보옥은 부귀영화를 뜬구름처럼 보며 산으로 들어가 불교를 설경하며 살아 장유불반이라 장유화상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수로왕의 일곱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불교에 귀의하여 여러 산을 밟으며 수도 증진하였는데 지리산에서 성불하여 칠불이 되었고 장유화상이 장유 한 그 지역은 장유라고 지명이 되었고, 일곱 왕자를 성불 시켰다고 그 산을 불모산이라 부른 것이다. 허보옥이 장유불반한 불도지역은 고려때는 장유촌이었으나 고종 22년에 장유면이라 개칭되었고 지금은 장유동이다. 장유사는 장유동 대청리 불모산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예종 때의 「지리지」에 “불모산 장유사는 선종에 속한다.”고 적고 있고 『김해읍지』는 “장유암이 김해부 서남쪽 30리 추월산에 있다.”고 적고 있다. 김해에서 가장 높은 산이 창원시와 경계했는데 801m의 불모산 713m의 용지봉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끼고 있는 산의 상류 중턱에서 동으로 낙동강과 옛 김해 평야를 시원하게 관망하는 자리에 해동에 최초로 불교를 가지고 온 가락국사 장유화상의 수도처 장유암이 불향을 따뜻하게 품고 길손을 맞이한다. 장유암의 최초 창건은 가락국 때로 보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중창하였고 그 후 세월 속에 또 불타 1935년 12월에 중수하였다. 그 후 다시 해방을 맞은 후 6∙24 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장유와 김해의 불자들이 정성을 모아 본전 칠성각, 범종 등을 1982년 까지 중층 하였고 본전을 비롯하여 주위를 근대에 주지 스님과 불자들이 역사에 가람답게 크게 중수하였다. 본전을 바라보는 자리에 위치한 높이 241cm의 장유화상 사리탑은 많은 전화에도 남아 1935년 중창 때 탑을 보호하는 난간을 만들고 「가락고도 장유암 중수비」를 세웠으며 사리탑은 1975년 2월 25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는 1915년 5월에 주지 선포담이 세웠고 또 하나의 보물이 사에 있으니 화상의 탱화다. 광무 7년에 지리산에 무주암에서 이곳으로 이안되었으니 반가운 일이지만 언제 누가 그렸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음이 신비를 더하고 해동 최초의 선승을 진영으로 볼 수 있음도 감사한 일이 아닌가? 장유암에 대한 시가 『김해읍지』에 실려 있다. 작가는 허의가 지은 금릉팔적으로 본 책자에 담고 있지만 금릉팔적 여섯 번째인 장유암과 장유암에서 동남쪽 낙동강과 옛 김해평야를 바라보며 노래한 장유암 8경을 다시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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