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명희

 

▣약력

2004년 계간 『에세이문예』 등단

2006년 『여인의 날개』작가상 수상

 

 

어느새 봄이다. 어디새가 앞산에 날아와 어디냐고 열심히 물어보고 물어보는 걸 보니. 남들에게는 그저 이름 모르는 봄새의 울음소리일 뿐이라는데 나에게는 어디냐고 물어주는 봄의 전령이 되어 몇 년째 찾아오고 있다. 테라스 벤치에 함께 앉는 이에게는 꼭 어디새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하지만 웃기만 할 뿐 그런 소리로는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리듬감 있게 ‘어디이 어디이’ 외쳐대는 새는 엄마를 찾는 아기새일까, 아내를 찾는 남편새일까, 암새를 찾는 수새일까. 늘 궁금해서 금방 먹은 밥도 내 속의 허기를 채우지는 못한다.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사람들마다 느끼는 행복한 시간대를 조사한 결과를 관심 있게 본 적이 있었다. 주부는 가족이 모두 나가고 집안 정리를 다한 오전 시간대에, 40대 직장인 남자는 가족이 다 모인 저녁 시간대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40대 중반이었던 남편에게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집에 빨리 오라고 닦달하지 않을 때라고 했다. 대화가 중단되었다. 서운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철이 들겠거니 하면서 지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가 행복할 수 있게, 가정이란 그물의 한 쪽 끈을 풀어놓았다.

맞벌이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그는 집에 먼저 들어가거나 혼자 집에 있기를 싫어한다. 나보다 더 이기적인 그에게서 연민을 느낀다. 아이들이 가끔 오는 빈 집이 나에게는 늘 그리움으로 가득한데 그에게는 아내가 없는 집은 혼자 산책하다가 쉬는 공원 정도이다. 신혼 시절에도 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에게는 아내가 없는 집은 귀가하지 않는 집이었다. 남편을 혼자 두고 친정에라도 가는 날이면 그에게 집은 구름 속에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많이 다투면서 그 버릇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그는 역마살과 나보다 먼저 결혼을 해버렸다. 지금도 가끔 그가 먼저 퇴근하는 날이면 어디? 어디냐고? 물어오는 그를 보면 아내새를 찾는 게 아니라 어미새를 찾는 것 같은 어디새 울음소리의 환청이 나를 집으로 이끈다.

외며느리여서 직업을 갖는 것보다 가정주부로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시부모님의 말씀에 충실했다. 외아들인 남편은 생활비를 취미로 가끔 주었고, 시댁에서는 특기로 생활비를 대주었다.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는 것을 깨달은 때에 내게 필요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생각해봐도 직업이었다. 그래서인지 30대 중반에 생긴 마음의 주름살에는 작은 딸이 그려져 있다. 작은 아이 네 살 때 옆집이었던 시댁에 맡겨두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둘째 딸은 엄마 어디? 언제 오냐면서, 할아버지가 밥 잘 안 먹는다고 꿀밤을 준다면서, 꿀밤 싫다면서 보챘다. 꿀밥이 아니라 꿀밤이어서 아기새는 더 울었을 것이다. 가끔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작은 애는 계속 전화를 해댔다. 받기 불편해서 한번은 전화기의 벨소리를 무음으로 돌렸다. 일이 끝나고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백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한 번이라도 무심하고 철이 덜 든 엄마는 아니고 싶었는데 전화기를 안고 잠이 든 아이 앞에서 이 엄마의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대학생이 된 작은 딸이 주말에 집에 오면 남편이랑 테라스 벤치에 앉아서 바람이 흔드는 댓잎소리를 들으며 시원하다고 수다를 떨어댄다. 가끔 어디새가 열심히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엄마새를 찾는 애기새 소리 같은데 들리냐고 물어본다. 딸은 어떤 소리냐면서 딱따구리 소리만 들린다고 한다. 또 다른 새소리를 자세히 들어보라고 하면 어디이가 아니라 룰룰루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들린다고 한다. 아이는 그 손가락 아픈 기억을 잊었다, 철없던 엄마의 행동까지 잊었다.

남편은 오십대가 되면 아이들이 들리는 소리는 잘 안 들린다는데, 환청 아니냐고 묻는다. 차라리 환청이었으면. 그들이 지금껏 나를 찾은 것이 아닌 것이 된다면 하고 엄마의길, 아내의 길을 자꾸만 뒤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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