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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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시조 수로왕릉 서편 수릉원 입구에서 세월을 머금은 차나무와 '다조 보주태후 허황옥상'이 있다. 차나무는 2007년 3월 21일 김해시 농업기술센터 직원들이 육종학자 우장춘박사가 키웠던 것을 이곳에 옮겨심었으니 김해의 보물이 탄생한 것이다. 필자는 나무를 사랑하는 임업과 직원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시민들의 차사랑을 기리고자 그 자리에 다조상을 세워 2010년 4월 27일 가야문화축제 개회식때 개막하였다.
매년 차인들이 헌다로 다조께 감사의 예를 올리고 있다.
차나무에 대해서 감히 어떠한 식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비로움을 다시 찾아보면 열매와 꽃이 가을에 만나는 실화상봉수요 만남 후 열매는 땅으로 돌아가 싹을 튀우고 뿌리를 내려 새로운 차나무가 되고, 꽃은 열매와 이별 후 벌과 나비와 바람을 불러 노닐다 열매가 되어 겨울, 봄,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꽃을 만나는 참 신비롭고 아름다운 식물이다.
우리의 어버이는 왜 딸이 시집갈 대 차씨를 혼수품에 넣어서 보냈을까? 차나무는 그 뿌리가 직근이라 쉬 옮길수 없고 꽃과 열매는 1년마다 만나는 금실좋은 사랑의 나무라 부부가 되면 뿌리를 깊이 내리며 잘 살라는 교훈을 담았으리라.
먼 옛날부터 차로서 만남의 예를 다하고 이별을 했던 차였다. 스님들이 정진하는 자리에도 중생과 만나는 자리에도 차가 있었고 다실, 다방은 궁에서 서민의 생활터전까지 심지어 커피를 파는 곳은 다방이었고 각종 꽃과 열매와 잎으로 만든 음료는 차가 되었으니 차나무의 싱그러운 자태를 나는 흠모하며 사랑한다.
차는 언제부터 사람과 함께 하였을까?
차는 중국의 글자로 '차' '다'로 읽으며 사전은 그 뜻을 '차풀다'로 적고 있다. 언제부터 사람이 음용했는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차란 글자는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차란 글자가 나타난 시기가 곧 사람이 차를 이용 또는 활용한 시기일 것이다. 많ㅇ른 사람들이 차의 고향을 중국으로 보고 있다. 차재배 면적과 그 생산이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수령이 깊은 차나무 역시 중국에 있다. 운남성의 남나산 대차수와 귀주의 대형 고목 야생 차나무다.
차에 대한 최고의 역사서는 중국 당의 육우가 쓴 『다경』이다. 육우는 『다경』에서 "차 마시는 법은 신농씨로부터 알려졌다."고 했으나 신농씨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다만 『다경』은 차에 대해서는 세계최고의 고서로 육우 시대에 차가 성행했음을 전해주고 있다. 차라는 글자가 당대에 만들어졌음을 『다경』이 확인시켜준다 하였다. 실제로 『다경』이전의 문헌에서는 차라는 글자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보다 한 획 많은 도자가 있다. 도자는 서한시대 사람인 왕포의 동약에 실린 "포별팽도 무양매도"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이 도를 차로 해석해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 대에서도 도릉이라는 지명을 볼 수 있는데 반고 권 15상에 :도릉절후 유흔:이 나온다. 육우는 『다경』에서 시대미상의 「다릉도경」에 대해 "다릉이란 능곡에 차명이 나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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