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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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21년 "관찰사 이 선이 도절제사이 교와 함께 누상에 연회를 베풀었는데 누가 무너져 8명이 압사하였다. 이로 1명이 면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불훼루 건립 후 30여 년 만에 누각이 무너진 것이다.
역사를 기억 못하는 사람은 다시 그 역사를 겪게 된다고 했다. 금강사도 불훼루도 사라진지 오래지만, 불훼루란 이름을 얻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 김해부사 현맹인의 노력을 기억하며 도관찰사와 도절제사로 불훼루에서 못난 짓을 하다 압사했다는 이름만 남긴 이 선과 이 교등 참 부끄러운 관리를 기억해 본다.

금강사의 차나무

충렬왕은 왜 금주에 와야 했는가.
충렬왕은 고려 제25대 왕으로 1236년에 태어나 1308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1274년에 왕이 되어 34년간 재임하였으며 몽고, 즉 원의 침략과 지배와 간섭에 시달린 임금이었다.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였고, 왕후의 월권과 원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정치에 흥미를 잃어 사냥과 향락에 심취,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고 역사는 적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힘이 없어 원나라와 왕비의 눈치를 보는 울분으로 사냥이란 이름 아래 동물을 원의 권력자로 왕비로 보고 화살을 날렸다고 위로해 본다.
몽고의 내정 간섭 속에 왜의 노략질까지 극심해 백성들은 삶이 피폐하다 못해 위기의 나날이었다. 동해와 남해로 노략질을 일삼는 왜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려는 현종 3년에 왜군 침투 관문인 김해를 금주로 개칭하여 방어사를 두고 동해와 남해의 국방을 맡은 동남해선병도부서사 본영으로 삼았다. 세 차례 설치되었는데 제1차는 문종 32년부터 명종 20년, 제2차는 신종 5년부터 충렬왕 19년까지, 3차는 공민왕 17년부터 우왕 4년까지 였으니 당시 고려의 국방에 김해가 차지한 중요한 위치와 그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이 김해 즉 당시 금주에 온 것은 즉위년인 1274년 봄이었다. 즉위 직후 고려와 원의 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위한 거점으로 설치한 진변만호부가 금주에 있었고 그곳에서 훈련하는 군사를 걱려하기 위해 내려왔던 것이다. 고려와 원의 연합군은 합포에서 출정해 대마도는 김방경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의 힘으로 무찔렀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정벌은 실패하였다. 1281년에 2차로 정벌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폭풍우로 실패하였다.
그 당시 금주의 영현은 함안, 의안, 합포, 칠원, 구산이었는데 충렬왕은 합포로 가는 길에 금주의 금강사를 찾았던 것이다.
충렬왕은 큰 치적이 없다는 것이 역사의 평가이다. 원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야 했고 세금을 낭비하는 사냥만 즐긴 왕이었을까,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지 못하는 울분을 화살촉에 담았던 것은 아닐까?
원나라의 지배로 고려 땅의 금은보화는 물론 아름드리 소나무가 장작으로 몽고로 실려 가는 참담함 속에서 또 다른 적인 왜국을 물리치고자 원의 힘까지 빌려야 했던 고려 말기. 그리고 김해 땅까지 와서 '장군차'를 남긴 충렬왕을 다시 생각해 본다.
1274년이나 1281년 당시 충렬왕의 고려군이 일본 정벌에 성공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리고 일본은 어떻게 변했을까? 충렬왕이 전쟁터로 나가는 병사들을 격려하여 장군차라고 이름을 내린 사실을 영의정을 지낸 하 륜이 금강사를 찾아 노래했으니, 그 산다수 즉 장군차는 언제 어디서 왔을까?
민간에서는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에게 시집 올 당시 허황옥 공주가 옥함에 차씨를 담아 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김해 백월산에 죽로차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에서 가지고 온 차씨앗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백월산은 옛 가락국의 땅이요 김해군 관할이었으나 지금은 창원시 복면이다. 백월산을 몇 번 찾아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어떤 이는 백월산이 옛 김해군 녹산면에 있는 명월산이 와전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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