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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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년 중시독권관 이후 영의정부사, 좌정승, 좌의정을 역임했으니 기문은 1406년 이후에 지은 것이다. 인품은 중후, 침착 대범하였으며 태종의 묘정에 봉안되었다. 후대에 그를 한나라의 장자방 송나라의 치규라 일컫기도 했다.
조선 초기 최고의 문신이었던 하 륜이지만 지은 글이 음강사가 아닌 금강사 불훼루기 이니, 금강사는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고 다만 고려 때 중수한 것으로 느낄 뿐이다. 하 륜의 기문으로 해서 고려의 충렬왕이 금강사에 들려서 차나무 군락을 보고 장군수라고 이름을 내려 준 것을 알게 되어 김해의 특산품 장군차가 탄생한 역사는 흉내낼 수 없는 나라사랑과 백성사랑을 담았기에 더욱 아름답다.
감사하게도 서거정이 노래한 금강사가 전해지고 있다.

금강사 - 서거정

 역진명구신마제
 분성성북방초제
 금관고국건곤로
 옥련증유세월미

 시조릉심산적적
 장군수노초처처
 가야고물금유재
 요건가인장갱저

 말을 믿고서 명승을 두루 밟아
 분성 성북으로 이끌려 찾았네라.
금관 옛 나라 천지도 늙어
 임금이 탄 수레 노닐었던
 세월 희미하다.

시조의 능은 깊어 적적하고
 장군 차나무도 늙어 풀이 무성하다.
가야의 옛 문물 아직 남아 있으니
 풍요로이 주인의 노랫소리
 다시 낮아진다.

『김해읍지』는 "금강사는 김해부의 북쪽 대사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대사리는 큰 사찰이 있는 고을이란 뜻인데, 지금은 대사리 지명도 금강사도 그 흔적도 없다. 다만 한 륜의 「불훼루기」에서 '누'를 승려들이 2개월 만에 지었으니 금강사 많은 승려가 부처님을 모신 큰 사찰 이었고 토산조에 "황차-금강곡에 있는데 일명 장군차"로 적고 있음은 참 감사한 선물일 것이다.
금강사는 금강곡에 있었을 것이며 차나무는 금강사 주변에 많이 자생 또는 재배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1985년 가야문화운동 제창 후 혼자서 가락국의 영역을 옛 김해시?군으로 생각하고 산하를 여행하였다.
그 여행은 고장의 곳곳을 당시의 기록과 구전에 따라 탐방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1987년 여름에 내어놓은 『가야의 얼을 찾아서』지만, 졸서 다음으로 나에게 큰 희열을 준 것은 송악곡과 금강곡에서 만난 차나무였다. 송악곡의 자생 차나무는 김해시가 보존 관리하고 있으나 금강곡의 차나무는 대부분 개발로 사라졌음을….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은 금강곡 한 자락에 금강사의 간판을 걸고 옛 금강사를 중창하려는 스님과 불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나약하고 그래서 너무나 큰 바보라 원력으로 금강사를 복원하기 위해 진력하시는 스님을 먼발치에서 보기도 아프다.
금강사는 가락국 이후 고려 조선의 천 년이 넘는 역사기에 왕이 직접 김해의 사찰을 찾아 백성을 격려하고 장군수라는 선물을 주어 '장군차'라는 김해의 보물 브랜드가 탄생한 곳이다. 금강사가 그 옛날의 대찰로 중창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충렬왕이 장군수라 애찬하였으니 차나무가 풍요로운 사찰로 거듭날 수는 있지 않겠는가. 필자는 종교적 이념을 떠나 깊은 마음을 모아 깜깜한 밤 금강곡 금강사불당을 찾아 남들이 보지 않으니 부끄러움 없이 내 형편대로 일만 원 한 장을 올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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