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 이건희 철학박사 / 경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

백산 이건희 철학박사

이 세상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기원전 500년을 중심으로, 기원전 800~ 200년까지 약 600년을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 1969년)는 차축시대(車軸時代, Achsenzeit, axle age)라고 불렀다. 역사상 대부분의 위인은 거의 이때 나타났다.

 붓다(기원전 624~ 기원전 544년), 공자(기원전 551~ 기원전 479년), 소크라테스(기원전 470 ~ 기원전 399년) 등이 이에 속한다. 고법사주학의 시원인 춘추전국 시대 낙록자(珞碌子)와 귀곡자(鬼谷子) 또한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을 제창한 전국시대(기원전 403?년~ 기원전 221년)의 추연(鄒衍)이나 그 후, 재이설(災異說)과 음양오행설을 논술한 전한시대(前漢: 기원전 206~ 기원후 8년)의 동중서(董仲書)등도 낙록자와 귀곡자에 버금가는 혜안이 있었을 것이다. 사주명리학은 이렇듯 인간이 사물을 보는 순수한 이성이 때 묻지 않은 시기에 태동하였다.

 이 때 순수한 이성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예외 없이 지니고 있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중화된 마음을 의미한다. 명리학과 관련된 많은 고전들 이를테면, 『낙록자삼명소식부주』, 『명통부』를 비롯해서 송‧명대의 『연해자평』, 『적천수』, 그리고 청대와 중화민국의 『적천수천미』, 『자평수언』에 이르기까지 사주명리학의 주요 저작들에서 보여 지는 일관된 주장은 “명리학은 마음의 변화를 살펴 운명을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 속의 이른바 술사들은 이를 간과하고 오로지 길흉화복에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 사주쟁이임을 자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중국, 한국,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3국의 철학에 있어서 제도권의 학자들은 공공연하게 사주명리학을 폄훼(貶毁)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송‧명대의 지배세력인 사대부들은 그들의 성리학적 시각으로 초기 명리학의 이론을 왜곡하기도 또는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은 음양오행론을 도입해 그 이전의 유학과의 차별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신유학으로도 불리는 성리학에 있어서 당시 문자권력을 지배했던 식자층인 성리학자들이 거의 대부분의 명리학서의 저자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대량의 도서가 공급되면서 성리학자들이 주도하는 명리학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철저한 중세 계급사회의 지배세력들에 의해서 쓰여진 사주명리학의 이론체계는 다분히 그들 중심의 세계관이 녹아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주명리학에 있어서 ‘상관(傷官)’은 ‘남편을 상하게 한다’, ‘관청에 반항한다’는 것인데, ‘상관’이라는 표현 자체에서 지배세력들이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대로라면, ‘상관’이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기피대상 인물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현대명리학에서는 ‘상관’에 대한 분명한 해석의 기준이 있으므로 걱정할 일은 아니다. 앞서 필자는 사주명리학의 가치가 단순한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살펴 스스로 운명을 다스린다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기존의 구태의연한 ‘저잣거리’식 사주학으로는 마음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마음을 객관화하지 못하면 자신의 어떤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정확하게 분석하기가 어렵다.

현대의 발달된 사주명리학에 의하면, 마음은 이성과 감성으로 구분되어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감정이란 후자인 감성적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감정을 다스린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인 셈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사주나 운에 의해서 평소 매우 표독스러운 말투가 확인 된다면, 금(金)에 해당하는 ‘상관’이 감성적인 표현으로 나타날 때일 가능성이 높다. 

엄동설한의 쇠붙이처럼 차고 날카로운 감정이 말과 행동에 묻어 나온다는 의미이다. 이 말의 의미를 사주명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상관’의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면 당장은 속이 시원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면 감정을 담고 있는 몸이 서서히 무너진다는 것이다. 금의 ‘상관’인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기관지, 폐, 대장, 관절 계통 등이 무너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금(金)에 의해 목(木)에 해당하는 간, 신경계 등의 장기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마음과 몸은 일체(一體)이기 때문이다. 몸이 무너지면 마음의 중화도 무너진다. 

마음의 중화가 무너진다는 것은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된다면, 운은 하늘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에 의해서 작동한다는 것을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간파했을 것이다.

전한(前漢) 시기, 『회남자』에는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그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情泄者中易測)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19세기 영국의 시인 토마스 하디 (Thomas Hardy, 1840~ 1928년)는 “성격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라고 하였다. 

운명은 하늘이 부여하지만 그 완성은 인간이 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하늘’(神)은 인간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비결을 우리 모두의 마음에 심어 놓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마음은 중화된 마음, 즉 감정에 지배받지 않는 이성적 마음 또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을 이토록 깊고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학문은 사주명리학 외에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1939년)나 그의 제자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1961년)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분석체계는 일생동안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사물과 반응하는 인간 개개인의 심리적 변화를 분석하는 세밀함에 비할 바가 아님을 단언할 수 있다.

기존의 이현령비현령식의 사주명리학이 명리학의 모든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를 바란다. 진정 자신의 삶의 가치를 높이고자 한다면, 그리고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면 ‘죽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기성찰의 학문이기도 한 사주명리학은 자신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조명해서 치우친 마음을 다스려 자신을 바로 알게 해주어 나아가 자신의 의지대로 살게 해주는 현존하는 제1의 수신학이다. 

「논어」, 「맹자」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배워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알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시간에는 “운명은 과연 인간을 지배하는가?”라는 주제로 흉운을 대처하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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