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순

이애순 작가

무엇이 그 분들의 뇌리에서 지난한 삶의 과정을 앗아갔을까.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시는 어르신들을 뵙고 위문공연도 하고 위문품도 전달하기 위해 요양원을 방문했다.

요양원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휠체어를 탄 노인들이 줄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앉아 계신다. 앞에는 커다란 VTR이 걸려있고 노래방 기기도 마련되어 있다. 위문공연 팀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이리라.

어르신네들과의 첫 대면에서 난 잠시 우두망찰했다. 무표정. 하나같이 아무 표정이 없으시다. 손님을 맞이하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휑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어르신들의 시선은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체념을 담은 듯 느껴졌다.

대부분의 환자가 치매 환자라는 요양보호사의 설명이다. 그분들은 어찌해서 그들이 일구었던 소중한 삶의 과정을 송두리째 도난당하고도, 아무 저항 없이 그 자리의 그 모습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그들을 보호해야할 가족들은 기나긴 간병에 지쳐, 가장 질긴 가족이라는 인연의 끈을 놓아버린 것일까. 우리시대의 노인 분들은 젊어서부터 그들에게 지워진 삶을 억척스레 일구시고, 자식으로서,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 해내신 분들이다. 하지만 복지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가족들에게 떠밀려 그곳에 내쳐진 것은 아닐지.

개성이 거세당한, 똑같은 푸른 줄무늬 환자복을 입고 계신 어르신들. 이젠 퇴물처럼 치부하는 이 사회에 대한 노여움과 상실감으로 노인 분들은 이렇듯 환자복 속에 정신을 숨기신 것일까.

푸른 줄무늬 제복은 그분들의 삶을 요양보호사의 손에 맡겨 보호사들의 시간표대로 살아가겠다는 무언의 표식 같다. 보호사들의 규칙에 따라 하루가 시작 되고 끝나고 그러다가 한 생이 마감되겠지.

얼어붙은 노인들의 가슴을 녹이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몇 몇의 지인들이 노래로 그분들의 마음을 두드렸으나 별 반응이 없으시다. 노래 몇 곡으로 수십 년 세월의 삶의 찌꺼기를 씻어낼 수는 없으리. 특별 공연무대로 앳된 소녀의 밸리 댄스가 이어졌다.

고등학교 2년생이라는 소녀는 목청이 가늘고 곱다. 소녀는 맑고 고운 목소리로 수줍게 인사를 한다. 통통한 예쁜 몸에 빨간 밸리복을 걸치고, 본능적 몸짓으로 어르신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인간은 언어가 있기 전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해왔다. 사고 능력을 잃으신 어르신 분들이라 그런지, 노래라는 언어보다 춤이라는 몸짓에 마음의 소통을 느끼시는 것 같다. 노래할 때 보다는 표정이 조금 열리셨고 박수로 근근이 박자를 맞추신다.

할아버지 한분은 유독 신이 나셨다. 최고라며 엄지손가락까지 추켜세우신다. 할머니들과는 달리 흥에 겨워 즐거워하신다. 그 연세에도 젊음이 좋고 여인이 좋다는 감정은 어쩌지 못하는 인지상정인가보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여신 것 같아 다행이다.

노래방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우리도 그분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한 몸이 되어 춤을 추었다. 한참을 추다보니 우리의 스트레스도 날아가 버렸다. 그분들이 나비인지 우리가 나비인지 엉키어 빙글빙글 돌았다.

이어 젊은 청년의 마술이 이어졌는데 눈앞에서 실제로 마술을 처음 보는 나로서도 참으로 신기했다. 우산을 펼치는 마술, 링을 끼웠다 뺐다 하는 마술, 인형의 앞 뒤 면을 바꾸는 마술이 펼쳐졌다. 마지막은 비둘기 마술이었다.

하지만 비둘기 마술은 마술 경력이 적은 젊은이에게 실패를 안겨줬다. 가냘픈 외모의 마술사는 애교 있는 웃음으로 실수를 만회한다. 생물은 우리의 마음대로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비둘기 공연은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는가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많은 정성과 소통의 시간이 필요하듯, 비둘기에게도 그들의 언어로 어루만짐이 충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여기 계신 어르신들도 이처럼 어루만짐과 소통이 간절히 필요한 분들이리라.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들은 마술의 의미를 알고 계시는 걸까. 삶의 진실에 눈감아 버리고 어둠속의 현실을 고통스러워 할 줄도 모르시는 분들. 마술은 진실을 은폐한 묘기가 아니던가. 어쩌면 치매를 앓고 계신 분들의 삶도 진실을 은폐하고 슬픈 묘기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퇴적공간>을 쓴 오근재 작가는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함과 동시에 그의 이름이 노인이 되어버렸다며, 대한민국에서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한다. 그는 이 책에서 노인복지 문제에 대한 정부시책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그는 정부의 시혜적이고 일률적인 복지정책이 결국 노인들을 가정에서 몰아내고, 요양시설로, 보호시설로 내몰았다는 의미 있는 지적을 한다.

어떠한 일정 조건이 되어야 보조금을 주는 경직된 정책으로 말미암아, 노인들은 호적에서 떨어져 나와야 했고 독거노인이 되었다.

반면 자식들은 부모를 버렸다는 양심적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어, 노인들을 위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젊은이들을 위한 복지 정책이 되었다는 지적은 새겨볼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잘못된 노인복지 정책이 독거노인을 양산했고, 가정 내에서 보살핌을 받아야할 노인들이 시설로 내몰리는 현상을 낳았다. 이것이 가족의 해체를 가속화시킨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또한 자식들에게는 노인을 봉양하지 않아도 되는 양심적 면죄부를 줌으로써 인륜과 도덕이 흔들리는 사회가 가속화 되지 않았을까.

치매환자의 문제는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답이 쉽지 않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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