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철 작가

 

최병철 작가

 

201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고운농원 대표

김해 문인협회 회원

경남 문인협회 회원

 

 

우리는 철과 플라스틱 문명 사이에서 겸작 하듯 고도로 발달 된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삶이 우리를 경쟁하도록 하고 그러한 생태계는 정신과 육체를 끝 모를 피폐함으로 몰고 간다, 그러한 환경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몸부림이 자연에 밀착한 삶을 살았던 향수를 끄집어내도록 해준다.

처음으로 뭍으로 나오던 시절의 기억이 아른하다. 나는 고향이 남해다. 하루도 바다를 보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다닐 때 남해대교가 생겼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남해 바깥을 나와보지 못했다.

 “바다가 육지라면”이란 가요처럼 만약에 바다가 육지였다면 나는 지금쯤 고향에서 쌀농사를 짓고 있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어서 빨리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도시로 나가서 현대문명을 접해보고 싶었다. 

첫 정착지인 부산 가는 버스를 타고 마산을 지나 김해에 들어섰을 때 끝도 보이지 않는 김해평야를 마주하고는 나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우리나라 최고의 쌀 주산지 중 하나라고 책에서 배운 그대로를 내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부산은 나를 전문 화훼농업인으로 성장시켜 주었고 이후 나는 김해로 옮겨와 농원의 터를 닦고 자리를 잡았다. 그 시절 김해 불암동 인근은 카네이션의 본고장으로 돈이 흔했다. 

그래서, 주의에는 장어집과 술집이 성업중이었다. 대동면은 최고의 장미 장인들이 탄생하기도 하고 모여들기도 하여 장미의 전설이 되고 있었다. 전국의 많은 화훼 농민들이 관광버스를 전세 내어 선진지 견학을 오는 그야말로 최고의 화훼단지였다. 

그 시기는 쌀농사를 짓는 논이 시설원예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자고 나면 못 보던 하우스가 생겨나고 하루가 다르게 고소득 농업으로 바뀌고 있었다. 비록 논이 비닐하우스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농지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김해평야의 광활함이 우스갯소리로 전해오기도 했는데, 누구누구가 밤에 논길을 잘 못 들어 밤새 김해 뜰을 헤매다 날이 밝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내가 농원을 경영할 당시 겪은 일화 중에서는 불암동 장어마을에서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두 대의 차로 나누어 농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차에 탑승한 직원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지름길로 오려다가 차가 농로에 빠졌다고 차를 좀 빼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보험회사의 고장 차 콜서비스도 없던 시절이라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내가 위치를 물어보니 주위에 건물이나 보이는 간판 하나 없고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시츄레이션?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위치를 찾으라는 미션인가? 정말 ‘난감하네’ 였다. 그때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있었다. 

비행기가 직원이 서 있는 곳에서 봤을 때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는지를 물어 대충 위치를 짐작하고 직원의 위치를 찾은 다음 주위에서 농사를 짓는 지인분에게 도움을 요청해 트랙터로 농로에 빠진 차를 빼내어 온 적이 있다.

내 청춘이 몸을 의탁한 김해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였는데, 그랬던 김해가 논 한가운데에 아파트가 생겨나고 밭과 산이 파헤쳐지고 그곳에 공장이 들어섰다.

 농업의 주름이 깊어갈수록 김해의 겉모양은 보톡스를 맞은 것처럼 팽팽해져 갔다. 얼마 전에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했다. 내가 농원을 경영할 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곳이다. 

신품종 화훼재배기술을 보급받기도 하고 시설지원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농지도 줄고 농민도 많이 감소했을 터인데 기술센터 직원은 배 이상 늘어난 듯했다.

 이제 김해는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공업 도시로 헤어스타일 바꾸었다. 농사를 접은 지도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나는 농부의 삶을 포기한 적이 없고, 언제나 농민이 잘사는 김해를 그려보곤 한다. 

기술센터의 외향이 확대되었듯이 농민들의 소득도 삶의 질도 더 높아졌으면 좋겠지만, 쌀 위에 우뚝 솟은 철의 문명은 잔뜩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이 시대의 농민들을 절벽으로 몰아가는 듯하다. 

농업은 포기해서도 포기할 수도 없는 산업이며 이를 지켜내고 있는 농민은 이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철을 용접하는 불꽃 속에 피어나는 장미의 모습에서 나는 붉은 쓸쓸함을 발췌하여 이 글의 잉크로 쓰고 있다. 잉크가 마르기 전에 나는 저 타오르는 불꽃을 구부려 다시 한번 꽃을 키워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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