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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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여러분이 정성스럽게 한 계획이 완성되었고 우부사가 기문과 이름을 얻고자 하는데 내 마음을 정하는 것이 세상의 도의를 위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내가 옛날에 거닐었던 김해땅이 아닌가.'
이로써 애써 사양하지 않고 누 이름을 불훼라 하고 예전에 보고 들은 것과 오늘에 마음에 느낀 바를 적어서 기문으로 한다. 이 누에 올라서 이 편액을 보는 자는 진실로 본심에 구하여 탐락으로 그 절도를 헐지 않을 것이요, 함부로 행동하여 그 덕을 헐지 않을 것이요, 개인 생각으로 공평한 도리를 헐지 않을 것이며, 편견으로 올바른 사리를 허물지 아니하며 작은 슬픔으로 인을 헐지 않을 것이며 작은 사욕으로 의를 헐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법전을 헐어서는 안 될 까닭을 생각해야 하며 조상의 가르침을 헐지 않을 까닭은 생각하여 무릇 한 몸의 사업을 헐지 않는 자라면 영세불훼의 땅을 생각할 수 있음이니 누에 오른 이익에 진실로 적지 않으리라.경치의 아름다움과 제작의 정밀함에 있어서는 직접 보지 못하여 상세히 말하기 어렵다. 하늘이 세월을 빌려주어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 촉석강에 배를 띄워 물길 따라 내려와 황산의 포구로 불훼루에 한번 올라 시 한 수를 지으리라. 안공의 이름은 순으로 판문하 쌍청선생의 손자요 개국공신 흥령군의 아들이다. 그의 행동을 보고 그의 너그럽고 깊은 마음을 알고자 글로써 치사하였는데 지금 없어졌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일곱 번째

하륜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이다. 1360년 국자감시, 1365년 문과에 각각 합격하여 관직을 시작, 1367년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의 비행을 탄핵하다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여러 관직을 거치다 1380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3년상을 마치고 복직되었다. 조선 태종을 적극 지지한 공신으로 높은 벼슬과 인사청탁을 가장 많이 받기도 했다.
1406년 중시독권관 이후 영의정부사, 좌정승, 좌의정을 역임했으니 기문은 1406년 이후에 지은 것이다. 인품은 중후, 침착 대범하였으며 태종의 묘정에 봉안되었다. 후대에 그를 한나라의 장자방 송나라의 치규라 일컫기도 했다.
조선 초기 최고의 문신이었던 하 륜이지만 지은 글이 음강사가 아닌 금강사 불훼루기 이니, 금강사는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고 다만 고려 때 중수한 것으로 느낄 뿐이다. 하 륜의 기문으로 해서 고려의 충렬왕이 금강사에 들려서 차나무 군락을 보고 장군수라고 이름을 내려 준 것을 알게 되어 김해의 특산품 장군차가 탄생한 역사는 흉내낼 수 없는 나라사랑과 백성사랑을 담았기에 더욱 아름답다.
감사하게도 서거정이 노래한 금강사가 전해지고 있다.

금강사 - 서거정

역진명구신마제
분성성북방초제
금관고국건곤로
옥련증유세월미

시조릉심산적적
장군수노초처처
가야고물금유재
요건가인장갱저

말을 믿고서 명승을 두루 밟아
분성 성북으로 이끌려 찾았네라.
금관 옛 나라 천지도 늙어
임금이 탄 수레 노닐었던 세월 희미하다.

시조의 능은 깊어 적적하고
장군 차나무도 늙어 풀이 무성하다.
가야의 옛 문물 아직 남아 있으니
풍요로이 주인의 노랫소리 다시 낮아진다.

김종간의 미친소리 열 여덟 번째

『김해읍지』는 "금강사는 김해부의 북쪽 대사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대사리는 큰 사찰이 있는 고을이란 뜻인데, 지금은 대사리 지명도 금강사도 그 흔적도 없다. 다만 한 륜의 「불훼루기」에서 '누'를 승려들이 2개월 만에 지었으니 금강사 많은 승려가 부처님을 모신 큰 사찰 이었고 토산조에 "황차-금강곡에 있는데 일명 장군차"로 적고 있음은 참 감사한 선물일 것이다.
금강사는 금강곡에 있었을 것이며 차나무는 금강사 주변에 많이 자생 또는 재배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1985년 가야문화운동 제창 후 혼자서 가락국의 영역을 옛 김해시?군으로 생각하고 산하를 여행하였다.
그 여행은 고장의 곳곳을 당시의 기록과 구전에 따라 탐방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1987년 여름에 내어놓은 『가야의 얼을 찾아서』지만, 졸서 다음으로 나에게 큰 희열을 준 것은 송악곡과 금강곡에서 만난 차나무였다. 송악곡의 자생 차나무는 김해시가 보존 관리하고 있으나 금강곡의 차나무는 대부분 개발로 사라졌음을….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은 금강곡 한 자락에 금강사의 간판을 걸고 옛 금강사를 중창하려는 스님과 불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나약하고 그래서 너무나 큰 바보라 원력으로 금강사를 복원하기 위해 진력하시는 스님을 먼발치에서 보기도 아프다.
금강사는 가락국 이후 고려 조선의 천 년이 넘는 역사기에 왕이 직접 김해의 사찰을 찾아 백성을 격려하고 장군수라는 선물을 주어 '장군차'라는 김해의 보물 브랜드가 탄생한 곳이다. 금강사가 그 옛날의 대찰로 중창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충렬왕이 장군수라 애찬하였으니 차나무가 풍요로운 사찰로 거듭날 수는 있지 않겠는가. 필자는 종교적 이념을 떠나 깊은 마음을 모아 깜깜한 밤 금강곡 금강사불당을 찾아 남들이 보지 않으니 부끄러움 없이 내 형편대로 일만 원 한 장을 올렸다.
『세종실록』21년 "관찰사 이 선이 도절제사이 교와 함께 누상에 연회를 베풀었는데 누가 무너져 8명이 압사하였다. 이로 1명이 면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 불훼루 건립 후 30여 년 만에 누각이 무너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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