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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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작가  안 유는 고려 고종 30년~ 충렬왕 32년의 인물로 고려의 명신이요 대학자였다. 초명은 유였으나 향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서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다시 초명인 유로 부르게 되었다.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쳤다. 원나라를 자주 왕래하며 주자학을 배워 우리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보급하였다.
그가 죽자 1318년 충숙왕은 그 훌륭함을 기리고자 궁에 있는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묘사한 것을 조선 명조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고려시대 최고의 명신이자 대학자인 안 유가 김해의 감로사를 찾아 시를 남겼음은 불교의 나라 고려시대 감로사의 명성을 느끼게 한다.

감로사 - 이견간

걸래선동득관평
각희연방거군성
삼면반공개악색
삼면반공개악색
일금허처시강성

전촌표묘어등암
별원소조안탑명
자니미기백의생

서둘러 선동에 온 것은 너그럽고 편안함을 얻고자
문득 연방이 그리워 군성을 떠났네.
삼면과 반쪽 하늘모두 산 빛이요
마음 허전한 한 곳엔 강물 소리다.

앞 마을 아득히 고기잡이 등불 어둡고
별원 호젓한데 안탑이 밝다.
임금을 생각하여 부지런히 축수하지 않으리요
높은 관직 받은 흰 옷 입은 서생이다.

작가  이견간은 고려 고종 46년~충숙왕 17년의 인물로 뛰어난 정치가요 시인이었다. 고려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오아 등 세 임금을 모신 청치가로서 통헌대부, 민부전서, 홍문관사를 지냈으며 특히 충숙왕 4년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상주의 객관에 머물면서 두견새 소리를 듣고 지은 시로 중국에 이름을 날렸다.

객사 깊은 밤 등불만 가물가물
초라한 내 모습 중보다 담박하구나.
두견새 울어대어
간밤에 저 산꽃 얼마나 졌을까.

이 시로 인해서 이견간의 호인 산화가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고려의 큰 인물이 감로사를 찾아 노래를 남겼으니 감로사지에서 만나는 차나무와 멀지 않은 곳에서 남해로 흐르는 낙동강이 더욱 아름답다. 시인 산화가 느낀 것처럼 감로사지에서 만나는 풍광은 푸른 산빛에 하늘은 반쪽이라 더욱 아름답다.

충렬왕의 장군수 금강사

『김해읍지』의 기록

금강사는 부의 북쪽 대사리에 있다. 고려 충렬왕이 합포에 왔을 때 여기에 와서 유람하였다. 불훼루가 있다.
영의정 하륜이 불훼루기에 말하기를 "김해는 옛날 가락가야였다. 가락은 신라와 함께 일어났고, 수로의 탄생은 참으로 기이하고 남긴 풍속이 순박하다. 올라 임하여 바라보면 아름다운 경치가 남방에서 으뜸이며 그 중에서도 금강사의 소헌이 제일이다. 사에 산다수가 있어 그늘이 뜰을 덮었다. 전대의 왕조 충렬왕이 여기에 연을 멈추고 장군차라는 이름을 내어주어 부로들이 서로 이 일을 미담으로 전해온다.
내가 소년 시절에 객으로 왔을 때는 바야흐로 중춘이라 산다가 무성하게 피어 반나절을 머물며 구경하였으나 넉넉하지 않았다.
다만 기둥과 추녀가 낮아 작은 나뭇가지와 잎이 얽히고설키어 멀리 보기가 어려웠는데 문 밖으로 나서자 곧 산과 바다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어 이리 저리 거닐며 시를 오래도록 읊다가 돌아왔다.
그 뒤에도 다시 한번 유람할 계획이었으나 아직까지 뜻을 이행하지 못했다.
이제 그rt의 부사 우군 균이 부 사람인 전 현감 왕사문과 와서 내게 청하기를 '유후 안공이 일찍이 본부 판관으로 있었고 도관찰이 되어 금강사에서 놀았는데 그때 김해부사 현맹인에게 말하기를 금강사 남쪽에 작은 누각을 지으며녀 반드시 기이한 경치가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백성을 괴롭히지 않고 사의 승도로 하여금 힘쓰게 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현군이 한 공인을 청해서 터를 잡아 짓기 시작하여 승도들이 힘을 다하여 두어 달 못 되어 완성하니 한 구역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여기에 있게 되었다. 또 누각 남쪽에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연을 심었고 그 동쪽에 흙은 쌓아서 뜰을 만들어 대나무를 심었다.
'가까우면서도 즐길 만한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청하옵건대 부디 이름을 지어 주고 또 기문을 지어 누각을 빛나게 해 주소서.'하였다. 나는 견문이 적고 글이 서툴다고 사양하였으나 지금 그부의 현량으로 절제사를 지낸 송득사군이 또 우군의 뜻으로 거듭 간청하였다.
내 말하기를 '금강이나 불훼는 석씨의 설이라 내 감히 그 뜻을 설명 할 수 없다. 그러나 누의 터가 이미 사의 경계에 이어져 있고 누각이 이루어짐이 사승도들의 손으로 지어졌으니 사의 설에서 이름을 취해 누의 이름이 되는 것은 구차함이 아닐 것이다. 사가 헐리지 않으면 누 역시 헐리지 않을 것이요 누가 헐리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이름도 없어지지 않으리라. 보통 누를 짓고 이름을 정하여 글을 짓는 것이 세도와 관계가 없을 듯 하나 세상 도의에 오르고 내림도 볼 수 있다. 만약 정사가 화평하지 못하거나 송사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시절이 좋지못하고 풍년으로 여유롭지 않으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하려는 뜻이 있는 자라 하더라도 능히 이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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