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작가

박지현 작가

지난 해 사화집 작품을 고민하면서 김해의 지명에 대한 책을 뒤적여보았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역의 지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었다. 살고 있는 지역을 기억하고 전해야 한다는 사념으로 헤매던 중 어느 밴드에서 책에도 소개되지 않은 진영의 월파정에 대한 짧은 글을 보았다. “월파정”, 달빛이 부서지는 정자, 옛날의 선비들도 달을 사랑하였다. 달을 사랑한 문인으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이태백이다. 이태백은 그의 시(詩) “월하독작”에서 달과 자신과 그림자, 그 셋이 달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교우 한다. 그림자는 이태백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실은 자신이 달과 둘이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호수에 비친 달과 술잔을 기울이는 이태백의 시에서 아득한 은하를 이어가는 광대한 상상력을 음미할 수 있다.

 

달을 사랑한 선비들의 이야기가 담긴 우리나라의 월파정은 세 곳이 있다. 그 대표적인 월파정은 강릉시 저동 경포호수의 한가운데 새바위에 있는 정자이다. 경포호수에 비친 달빛이 물결에 흔들리는 것에 비유하여 지어졌다. 경포대 월파정의 설경은 그림 속 풍경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워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두 번째는 정약용이 노래한 경상도 선산의 월파정으로 낙동강줄기의 일원에 위치하고 있던 정자였다. 정약용이 지은 오언율시 “월파정에 올라”는 월파정의 풍경을 묘사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전라도의 섬진강 줄기의 월파정은 강기슭의 기암괴석과 천년 묵은 낙락장송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하게 하는 정자이다.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에 두루 있었던 월파정 중에서 유일하게 강릉의 월파정만이 남아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고 다른 곳은 잊혀졌다.

 

진영에 살면서 월파정이라는 그런 정자의 흔적을 본적이 없었기에 궁금하여 찾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지답사는 시적 상상력을 제공하는데 필수불가결이다. 밴드의 주소로 차를 몰고 갔지만 정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온 길을 몇 차례 반복하여 헤매다 도로가장자리의 주유소 뒤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꺾어 들어가니 산자락에 수수한 단청의 한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동차가 주차 되어있는 대문 앞에는 월파정 중수비가 서 있고, 대문이 굳게 잠겨 있어 사랑채 옆 화장실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 보니 바람의 흔적이 과거를 말하고 있는 “월파정” 현판이 걸려 있었다. 대청마루 동쪽 벽면에 조선전기의 문신인 점필재 김종직이 담헌 김극검에게 헌사한 한시(漢詩) “탐매”가 새겨져 있었다. 월파정 뜰의 매화를 감상하면서 기증한 시(詩)는 세월의 흔적 속에서도 선비들의 정서와 교감을 느끼게 하였다. 한시의 내용은 눈 내린 밤 달빛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한 매화를 하루라도 보지 않고는 안되겠다는 김종직의 칠언절구의 시였다. 눈 내린 밤 달빛을 받은 월파정에서 김종직은 임포에 버금가는 벗인 김극검과의 우정을 노래하였다. (月波亭呈探梅/竹輿日日繞東湖/不可梅花一日無/雪月輝然偏娬娟/江山勝處轉羈孤/攀條未忍輕尤物/把筆何曾賦子都/七点三又春亦好/聞君知己有林逋)

 

김극검이 머물던 삼칸집은 몇 해 전에 사람이 살던 흔적들이 퇴색한 마루의 색처럼 바래져 있었다. 왼쪽 방에는 만화책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김극검의 후손이 애독한 책일 것이다. 경서와 만화책, 고담준론하던 조선의 선비와 만화책을 열독하는 오늘 날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과거의 월파정과 현재의 월파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쓴 미소가 절로 번진다.

 

진영의 월파정은 성종때 문사들에 의해 참판공 김극검을 위하여 지워졌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종직은 밀양의 외가에 있었던 탓에 김극검과 자주 만났다고 한다. 밀양과 김해를 오가며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나누던 곳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985년 김극검의 종중에서 이를 복원하였지만 이미 변해버린 지형은 그들이 나누었던 지란지교의 현장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버렸다.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기보다는 지금과 다가올 일로 노심초사하는 우리 일상들에서 지나간 길의 흔적은 점점 잊혀지기 마련이다. 달빛은 여전히 고고히 부서지지만 그 빛을 받을 수 있는 호수는 연잎에 뒤덮혀 있고, 제대로 돌보는 이 없어 세월과 잡초에 삭이어가는 월파정을 기억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이처럼 잊혀져가는 김해의 명소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시(詩)로 표현하는 사화집은 온고지정을 향한 작은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일 년에 한 번 김해지역 문인들 중심으로 발간되는 사화집은 사라져가는 선인들의 자취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연결 시키는 즐거운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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