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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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불우에서 부른 노래

 

김종간 향토사학자

『읍지』에 작가의 시가 실리고 호를 월강이라 했지만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했다. 구를 '구지봉'편에서 우리글로 '귀'와 '구'로 해석하며 소견을 밝힌 바 있다. 신어 산의 거북바위라면 귀암으로 쓰고 읽어야 하는데 구암과 구암으로 표기하고 읽는 것은 가락고도 김해만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바위와 돌이 기암괴석이라면 가락고도는 구암귀석이다. 시조 수로 왕을 배출한 성스러운 땅임을 자긍심으로 이어가는 가락가야 도읍지의 독창적 문화를 가슴에 담아 보자.

이세사 - 곽 여

삼추벽해천층랑
일엽편주민리인
원청종성심도사
서유풍의욕서진

가야국엽련강초
수로왕손작군민
남토구도금기견
편범환향해산춘

긴 세월 푸른 바다 수많은 물결
일엽편주로 먼 길을 가는 사람.
멀리서 종소리 듣고 이세사 찾아
잠깐 행동거지 멈추고 진실을 구하      리라.

가야국 왕업 강의 풀밭에 이어지고
수로왕 후손은 고을 백성이 되었다
남쪽 땅 옛 도읍지 이제 보았으니
조각배 돌려 바다와 산의 봄을 찾아간다.

김종간의 미친 소리 스무 번째

이세사는 시만 읽어서는 어느 산에 있었는지 그 흔적도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어산에 구암사, 십선사, 청량사, 이세사가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작가 r hkrdusms 고려 문종 12년~인종 8년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로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에 소속되었다가 합문지후, 홍주사를 거쳐 예부외랑으로 사직하고 금주에 은거하였다. 도교, 불교, 의약, 음양의 설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며 한번 보면 곧 외워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세사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작가가 금주에 은거하면서 지은 시로 보인다. 천 년 전 고려 전기의 문신이 가야국과 수로왕 도읍지를 시로 노래했는데, 가야의 후손은 시를 짓기는커녕 선현이 지어 부른 시 마저도 모르고 있음을 부끄러워한다.

김해의 큰절 신어산의 은하사

김해의 명산이자 불교 성지로 구암등 많은 사찰을 품었던 신어산 중턱 자락에서 김해인 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있는 은하사가 있다. 60년대까지 우리의 어머니들은 큰절이라 불렀는데 「읍지」에는 시가 한편도 전하지 않고 있음이 아쉬움이다. 2001년 11월에 이곳에서 촬영되어 만들어진 영화 「달마야 놀자」로 은하사는 전국에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대웅전은 경남 유형문화재 23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건은 가락국때 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여러번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록은 서림사와 은하사란 이름의 뿌리를 전하지 않고 있다. 『조선사찰사료』 상권 활천면 서림사기를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 기록에서 1688년부터 1904년까지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 후기에 쓴 것이다.
활천이란 이름은 1469년에 간행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활천리가 나오고 있지만 역사서인 『김해읍지』의 불우조에서 「서림사」를 "서림사는 신어산에 있다"고 적고 있으며 「속」으로 은하사를 적고 "신어산에 있는데 속칭 서림사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의 『읍지』는 1929년 4월에 발행한 것이므로 서림사는 1800년대 초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본다. 또한 영조대와 1800년대 이후에 그려진 옛 김해부의 지도에 은하사는 찾아볼 수 없고 모두 서림사만 나타나고 있어 은하사는 후대의 즉 1800년대 후반에 붙혀진 이름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은하사에 보관되어 있는 창건과 증수 및 불사에 관한 현판 13개가 있는데 필자의 무지는 믿음으로 평가를 할 수 없어 몇 점의 전해진 시를 불러본다.

야숙 서림사 돈공방 - 이학규

척촉화잔산월원
선당초체절운연
노승격발전경루
숙객구겸간야천

정청자치제옥상
시지교목도염전
은하루반제시처
청몽의의사왕년

철쭉꽃 지는 산속 달은 둥글고
선방이 멀리 구름 속에 가렸네.
노승이 방울 울려 시각을 전하니
나그네가 주렴 사이로 밤하늘을 본다.

고요한 절 지붕 위 새끼 꿩 울음 듣고
높은 나무가 처마 앞에 닿은 걸 알았네.
은하사 누각 가시를 짓던 곳
맑은 꿈 그리웁긴 지난날과 한가지로다.

작가 이학규는 1770년의 조선 후기 문인으로 본관은 평창, 호는 낙하로 한양출신이다. 문학에 뛰어나 정조의 인정을 받아 포의로 규장전운 편찬에 참여하였다.
왕명으로 원자궁에 내릴 책을 지어 바쳤고 화성경리시말을 번역하였고 무이구곡도가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사옥에 구금되었는데 조사 결과 천주교와 무관함을 밝혀졌음에도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이해 10월에는 백서사건으로 다시 국문을 받고 김해로 이배 되었다가 1824년 4월에 아들의 재청으로 방면되었다.

이 시는 『낙하생집』 12권에 실려있으며 유배생활 23년을 한 김해의 정이 아프게 느껴진다. 또 『김해읍지』에는 "한식날 연자루에 올라"가 실려있는데 석방후 김해를 오가며 지역의 문화의 식과 그 수준을 향상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적 지성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가가 김해를 노래했으니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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