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계속>>>
퇴계가 남명에게 ‘애가 그와 더불어 신교를 나눠온 자 오래이다’ 또는 ‘평소 흠모하기를 깊이 한 바다’라고 하거나 ‘오늘날 남방의 높은 선비로는 오직 이 한 사람을 꼽는다’ 라고 하였다. 남명 역시 퇴계에게 편지하여 ‘평소 존경해 온 마음이 하늘에 있는 북두칠서만큼 크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남명과 퇴계가 진심으로 서로 흠모하였던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남명과 퇴계는 이처럼 ‘백년의 신령스런 사귐’ 혹은 ‘천리의 신령스런 사귐은 고인도 숭상하던 바’ 라고 하면서 서로 공경하였다. 남명이 71세 되던 해 퇴계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한 탄식은 우리로 하여금 감동에 젖어 들게한다. ‘같은 해에 나서 같은 길을 걸으며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이 죽었다 하니 나 또한 멀지 않았구나.’ 라는 탄식이 그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남명의 심정이 어떠했던가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2)남명의 실천정신
1) 상소문을 통해서 본 실천정신
남명은 명종 6년(1551) 종부시 주부로 임명받았으나 사절하였다. 이 때 실록의 사관은 “조식은 굳은 절개를 깨끗이 지키고 예법으로 자신을 자제하여 영달이나 이욕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품행이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라고 기록하였다. 연이어 기록된 글에는 “조식은 타고난 천성이 강건하고 정직하여 세태에 맞추어 행동하지 않고 자기 지조를 깨끗이 지켰다. 속된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수치심을 느끼고 가 버릴 생각을 하였다. 임금이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도록 불렀으니 나오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남명은 작은 벼슬에 연연하여 자신의 포부를 거두어 들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명종 10년(1555) 10월 11일 단성현감을 임명받았으나 10월 19일 사직상소를 올리고는 끝내 나아가지 않았던 것이다.